서구 팝은 예술이고 케이팝은 기예인가

2023. 4. 22.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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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 다이어리] '다크사이드 오브 케이팝' 담론의 헤게모니적 작동

[이지행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junelee74@naver.com)]
지난 3월 12일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스페인 매체 엘 파이스(El Pais)와 가진 인터뷰는 국내외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중에서도 "젊음과 완벽함에 대한 케이팝의 숭배, 그리고 성과를 향한 지나친 노력은 한국의 문화적 특성"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RM의 답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불과 70년 전만 해도 침략당하고 두 동강 나 아무것도 없던 나라가 지금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친 듯이 노력했기 때문이다. 수세기동안 타국을 식민 지배했던 나라의 사람들이 와서 '당신들은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의 삶은 너무 스트레스가 심해요'라고 말하다니... 그런데 뭔가 해내려면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케이팝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이 답변은 제국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통쾌한 카운터펀치라는 찬사와 전형적인 '그쪽이야말로주의(Whataboutism)'라는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이 인터뷰에서 눈길을 끈 것은, 해당 매체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룹의 리더에게 한 질문 중 상당 부분이, 혹독한 트레이닝과 생존 경쟁으로 얼룩진 케이팝의 '비인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시스템에 관한 것들이었다는 점이다.

기자의 질문은 구글에 '다크사이드 오브 케이팝(The Dark Side of K-pop)'이라는 문구를 치면 각종 기사와 동영상, 포스팅, 책을 통해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담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케이팝에 대한 가장 큰 선입견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란 질문에 RM이 "공장식(prefabricated)"이라고 바로 답을 내놓은 것도 자신들을 바라보는 이런 종류의 시선에 끊임없이 노출되고 단련되어 온 경험 때문일 것이다.

불공정계약, 미성년자 노동, 외모주의, 극심한 경쟁구조로 인한 비인간적 환경과 그로 인한 아이돌의 취약한 심리 상태, 팬덤 의존형 수익구조 등 케이팝 산업이 가진 문제적 면모는 한둘이 아니며 심지어 비밀도 아니다. 지난 4월 19일에는 그룹 아스트로의 문빈이 스물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어떤 상황 속에서 얼마나 괴롭게 버티고 있었는지 알 길 없으나, 그저 그가 느낀 고통이 자신의 직업적 상황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짐작을 해 볼 뿐이다. 그나마 아이돌 표준계약서를 도입하고 심리상담사를 배치하는 등 업계 차원의 개선 노력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고, 과거와는 달리 소속사와 대등한 위치에서 견제의 목소리를 내는 팬덤 위상 변화로 인해 산업의 외부적 관행은 부분적으로 개선되어가고 있지만, 아이돌 산업 내에서 발생하는 기본권과 인권 침해에 대한 정책적 개입이 여전히 시급한 실정이다.

반면 케이팝의 속성과 깊이 연관된 내부적 문제는 좀 더 복잡한 차원에 놓여있다. 케이팝 산업의 가장 독특한 지점은 아이돌과 팬과의 관계성이다. 팬과의 연결감은 아이돌에게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과 노동의 기쁨을 제공하지만, 역으로 외모, 실력, 인성, 살인적 스케줄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아이돌이 과도한 노력과 노동을 하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다. 이것은 아이돌 뿐 아니라 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팬도 아이돌을 덕질하는 과정에서 무료노동과 과도한 소비, 감정적 소진을 견뎌내고 있다. 정리하자면, '감정공동체'로서의 아이돌-팬 관계를 원동력으로 하는 케이팝 시스템의 모순과 문제점은, 시스템의 '구조적 압력'과 아이돌과 팬 양측의 '자발적 소진'이 겹쳐진 지점 위에 복잡하게 놓여있다.

스페인 기자가 레퍼런스로 삼은 '다크사이드 오브 케이팝' 담론은 케이팝의 이런 '복잡한 면모'에는 큰 관심이 없다. 철저히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렌즈를 통해 케이팝 씬을 바라본다. 그 결과 노예계약, 살인적 스케줄, 연애금지조항, 미성년자의 성적대상화 등 아이돌 인권과 노동환경 비판을 한 축으로, 케이팝 가수를 '공장에서 찍어낸 인형'이라 부르며 예술성을 폄하하는 태도를 또 다른 축으로 하는 담론이 등장했다. 그 중에서 이 담론이 케이팝의 예술성을 폄하하는 근거를 한번 들여다보자.

이 담론이 문제시하는 건 연습생 시스템이다. 연습생 시스템이 아이돌의 인권과 기본권에 끼치는 해악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다. 재능 있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아티스트가 되는 게 아니라 기획사가 연습생을 훈련시켜 아티스트로 데뷔시키는 작위적인 시스템이며, 따라서 케이팝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예술성은 자연스럽게 타고 태어나는 것이지 훈련을 통해 만들어낼 수 없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훈련을 통해 예술성을 만들어낼 수 없다면 예술적 재능은 태어나면서부터 선물처럼 부여되는 것인가? 그러나 예술가의 '천재적 주체'에 의미 부여하는 태도는 동시대적이지도 심지어 현대적이지도 않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시기를 거치면서 예술가의 창조성보다는 예술가의 선택으로, 그리고 예술에 의미 부여하고 향유하는 수용자에게로 예술의 무게 중심이 이동했기 때문이다. 사진의 등장과 함께 예술 작품의 기술적 복제가 가능해졌을 때, 아방가르드 예술가인 마르셀 뒤샹이 상점에서 구입한 변기에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했을 때, 컴퓨터그래픽 이미지(CGI)와 혼합현실(MR) 속에서 가상과 실재가 구분되지 않고 뒤섞여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냈을 때, 이런 도약의 계기마다 예술성의 범주는 끊임없이 변하고 확장되어 왔다.

'다크사이드 오브 케이팝' 담론이 생산하는 효과는 명확하다. 연습생이라는 과정을 거쳐 아티스트를 만들어내는 시스템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진정한 예술가'로 호명하는 것이다. 즉, 서구의 보편적 예술가 시스템을 정상이자 진정한 예술로 옹립하고 자연화한다. 이 담론 안에서 케이팝은 예술이 아니라 희한한 '기예'가 되어 글로벌 음악 산업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RM의 스페인 매체 인터뷰에서처럼, 해외 매체와 인터뷰하는 케이팝 가수들이 개별 음악에 대한 질문보다 케이팝 문화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접하게 되는 상황은, 케이팝을 기예에 가까운 특이한 장르로 범주화하는 담론의 구동을 확인하는 자리다. BTS의 RM은 케이팝 아티스트로 범주화되지만, 드레이크는 캐나다 래퍼로 범주화되지 않는다. 어떤 대상을 범주화해 스테레오타입을 만들어내는 것은 전형적으로 위계 구도에서 발생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때 '다크사이드 오브 케이팝' 담론은 산업 윤리나 예술미학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글로벌 대중문화 헤게모니를 둘러싼 파워게임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사고와 커뮤니케이션의 상호작용적인 과정과 그에 따른 결과를 함께 의미하는 담론은, 세계의 의미를 구성하고 유지하며 변화시키는 사회적 과정이다. 이 담론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계급적 성격과 권력의 형식이 깃들어있어 늘 헤게모니를 둘러싼 긴장과 경쟁 상황이 존재한다. 케이팝에 대한 서구의 비평적 담론은 늘 '다크사이드 오브 케이팝' 담론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왔다. 남자 아이돌의 메이크업이나 중성적인 의상은 남성성(masculinity)의 결핍으로, 연습생 시스템은 마치 공장처럼 똑같은 것을 찍어내는 '예술성의 부재'로 읽어내며, 케이팝 아이돌의 자살 사건을 다루는 해외 기사에는 '어린 시절부터 혹독하게 연습생 시절을 거쳐야 하는 케이팝 공장 시스템이 만들어낸 비극'이라는 뉘앙스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당연히 이런 비판에 대해 케이팝 업계는 자유롭지 않으며, 반드시 수용하고 성찰할 부분이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담론의 헤게모니적 작동에 따른 효과로, 서구 아티스트들의 예술성에 대한 암묵적인 승인과 케이팝의 주변화가 뒤따른다는 점 역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BTS의 RM이 스페인 매체 <엘 파이스>와 가진 인터뷰는 국내에서 여러 반향을 낳았다. ⓒ<El Pais>

[이지행 동아대학교 젠더·어펙트연구소 전임연구원(junelee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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