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술 마시고 과속 중인 10대’···멸망 막을 자, 당신 아니고 누구겠는가[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3. 4. 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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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자”던
‘냉정한 이타주의자’ 저자 맥어스킬
먼 미래를 생각하고 당장 행동하는
‘장기주의’ 철학 관점을 전면 내세워
문명 붕괴·전염병·에너지 위기 등
해결의 주체로 ‘지금의 당신’ 제안
이미지 생성 서비스의 하나인 ‘미드저니’에서 ‘기후변화’, ‘식량위기’, ‘지구’를 키워드로 넣어 만든 일러스트

우리는 미래를 가져다 쓰고 있다

윌리엄 맥어스킬 지음·이영래 옮김|김영사|480쪽|2만2000원

모두가 살 만하고 지속할 수 있는 미래를 확보할 기회의 창이 빠르게 닫히고 있다.

지난 3월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위와 같이 경고했다. 10년 이내에 지구 평균온도가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도 이상 상승하여 지구 생태계가 붕괴 수준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AI 전문가 7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절반이 인공지능(AI)로 인해 인류가 멸종할 가능성이 10% 이상이라고 답했다.

역사학자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 <사피언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지난달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공동기고문에서 이같이 말했다. 챗GPT와 같은 언어생성형 AI 기술 발전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경고했다.

‘빨간 불.’ 고속으로 질주하는 인류 앞에 켜진 신호등의 색깔은 명확해 보인다. 세계적 과학자, 지식인들이 내놓는 미래 전망에 직진을 의미하는 ‘파란불’은 없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챗GPT 등 AI에 대한 우려, 핵전쟁 위험까지 인류의 미래가 어둡다고 말할 논거는 차고 넘친다. 옥스퍼드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윌리엄 맥어스킬은 현재 인류에 대해 좀 더 신랄하게 진단한다. “인류는 10대, 그것도 술을 마시고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채 앞이 보이지 않는 모퉁이를 돌며 속도를 올리는 10대다.”

<냉정한 이타주의자>에서 감정과 열정이 아닌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효율적 이타주의’를 주장했던 맥어스킬은 <우리는 미래를 가져다 쓰고 있다>에서 한발 더 나아간 ‘장기주의(longtermism)’ 철학을 내세운다. 앞날이 창창한 10대와 같이 인류의 미래는 아직 많이 남아 있고, 미래 사람들의 삶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전형적 포유류 종처럼 100만년 정도 생존할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앞으로 70만년 동안 인류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장기주의는 “미래에 긍정적 영향을 주는 것이 도덕적으로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 세계의 운명이 우리가 지금 하는 선택에 달려 있다는 믿음”이며 “미래 세대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관점”이다.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미래에 대한 대비는커녕 현재 존재하는 불평등과 빈곤 문제에 대해서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미래 인류를 생각해 현재를 희생하는 선택이 가능할까? 하지만 저자는 장기주의가 SF 소설에 나올 법한 추상적 위협에 대비하자는 얘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측할 수 없는 전염병의 위협,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핵무기 사용 위협, 가속화되는 지구온난화 등을 고려할 때 위협은 이미 우리 코앞에 닥쳐 있다. 저자는 “유전자조작 팬데믹, 제3차 세계대전,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재앙은 현재 세대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목숨을 앗아가는 동시에 미래도 위험에 빠뜨린다”고 말한다. 장기주의는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지금 당장 행동하는 것”이며 “대부분 장기주의적 행동은 단기적 이점도 가지고 있다.”

인류가 평균적인 포유류 종만큼 오래 생존할 경우 문명의 잠재적 미래. 출처 <우리는 미래를 가져다 쓰고 있다>(김영사)
현재 사회는 ‘녹은 유리상태’···늦으면 변화 힘들어

인류는 긴 역사를 살았다. 250만년 전 호모 속 구성원들이 있었으며, 현재 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는 30만년 전 진화했다. 농경을 시작한 것은 1만2000년 전이고, 첫 도시를 형성한 것은 6000년 전, 산업 시대는 약 250년 전에 시작됐다. 산업혁명·과학혁명 이후 인류가 이룬 번영은 인류의 역사로 볼 때 아주 짧은 기간이다. 저자는 현 세대가 인류 역사의 ‘극히 이례적인 장’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경제적·도덕적·환경적 변화가 빠른 시대이며, 이례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 앞으로 다가오는 미래에 큰 차이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시기다. 그러니 안전벨트를 고쳐 매고 운전대를 바로잡아야 한다.

저자는 현재 사회를 ‘녹은 유리상태’에 비유한다. 유리가 뜨거울 때는 어떤 모양이라도 만들 수 있지만 식고 나면 손댈 수 없다. ‘가소성’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가소성 기간은 전쟁과 같은 위기 뒤에, 어떤 사상이나 제도가 아직 새로울 때에 나타난다. 한반도는 좋은 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은 38선을 경계로 둘로 나뉘었다. 분단선의 위치는 우발적으로 정해졌다. 두 미국인 장교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를 이용해 북위 38도선을 분단선으로 제안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대략 절반으로 나누면서도 서울을 미국 관할 아래 두기 좋은 선이었다. 분단이 성사되자 되돌리기 어려웠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국가에서 살고 있으며 1953년보다 거의 30배나 부유해졌다. 북한 사람들은 전체주의 독재 정권하에서 살고 있으며 한국전쟁 이전보다 더 가난할 수도 있다.”

‘초기 가소성, 후기 경직성’의 역학은 기후변화에도 적용된다. 이산화탄소가 지구온난화에 미치는 영향을 예측한 것은 127년 전이었다. 1896년 스반테 아레니우스는 현대의 예측치에 근접한 예측을 내놓았다. 환경운동가 빌 매키번은 2019년 “30년 전이라면 비교적 작은 조치들로 이 싸움의 궤도를 바꿔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탄소 배출량에 세금을 조금만 매겼더라도 궤도가 달라졌을 테고, 우리를 완전히 다른 곳에 데려다놓았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2020년 3월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가 브뤼셀에서 열린 ‘미래를 위한 금요일’ 시위 행진에서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노예제는 저절로 폐지되지 않았다···‘우발적 사건’
미래를 바꿀 도덕적 가치관 필요···‘도덕적 이단자’가 필요

저자는 인류의 역사와 과학기술의 발전, 도덕·가치관의 발전을 두루 살피며 ‘장기주의’적 시각을 갖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람의 삶은 기술뿐 아니라 도덕적 변화에도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저자는 가치관 변화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해 노예제 폐지 운동을 예로 든다.

노예제는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됐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이집트·중국·인도 등 거의 모든 초기 농경 문명에 존재했던 노예제는 1807년 영국이 노예무역을 폐지하고, 1833년 노예제를 불법화하면서 폐지됐다. 출발점엔 벤저민 레이가 있었다. 북아메리카 필라델피아에서 사는 퀘이커 교도였던 레이는 도덕적 급진주의자였다. 대서양을 횡단하는 배 안에서 고통받는 노예들의 모습을 보고 노예제 폐지론자가 된 그는 진창에 드러누워 사람들이 자신을 밟고 지나가게 하거나, 노예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에 가짜 피를 숨겨 뿌리는 ‘기행’에 가까운 방식으로 운동을 벌였다. 레이의 행동주의는 퀘이커 교도에게 영향을 미쳤고, 북미와 영국 대중에게도 퍼져나갔다. 일각에서는 노예제 폐지가 산업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였다고 얘기하지만, 저자는 “사상가, 작가, 정치가, 노예 출신 운동가, 노예 반란자의 행동”에 따른 ‘우발적 사건’에 가깝다고 말한다. 노예제 폐지엔 비용도 많이 들었다. 1807~1867년 영국이 노예제 폐지에 들인 비용은 연간 국가 소득의 2%였다.

노예제 폐지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가치관 변화였으며, “현대사에서 가장 값비싼 세계적 규모의 도덕적 활동”이었다. 저자는 장기주의적 관점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한 가치관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의욕 넘치는 이단자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팬데믹을 표현한 일러스트.
인류 멸망 시나리오···기후변화·핵전쟁·전염병·발전 정체
문화적 다양성 지닌 ‘긴 성찰’이 필요

인공지능이 인류를 위협할 것이란 주요 근거는 ‘가치관의 고착’이다. 인간에 근접한 ‘범용 인공지능’이 개발된다면 특정 가치가 소프트웨어를 복제하는 것만큼 쉽게 복제될 수 있으며, 생물학적 노화과정으로부터 자유로워 백업을 통해 ‘불멸’할 수 있다. 저자는 범용 인공지능이 출현하는 날이 바로 시대를 지배하는 가치관이 고착화하는 날이라고 경고한다. 만약 편협하고 전체주의적인 가치관이 고착화된다면? 조지 오웰은 <1984>에서 이런 사회를 “인간의 얼굴을 영원히 짓밟는 구둣발”이라고 비유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에 가까운 인공지능 대신 ‘긴 성찰(long reflection)’이다. “재앙으로부터 안전하고, 좋은 삶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고 토론하며, 가장 번성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갈 안정된 세계의 상태”다. 도덕적 탐색이 자유로운 세상, 정치적 실험주의, 표현의 자유와 자유로운 이주에 기반한 사회의 문화적 다양성 증진이 ‘긴 성찰’을 위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인류가 당면한 위기란 무엇인가? 저자는 인류가 멸망하는 시나리오를 세 가지로 제시한다. 저자가 전망하는 인류 멸망 시나리오는 세 가지다. 기후변화와 핵전쟁으로 문명이 붕괴되는 시나리오, 유전자조작 전염병으로 인류가 멸망하는 시나리오, 발전 속도가 정체되어 멸망하는 시나리오다. 우리는 핵탄두 수천 기가 발사 대기 중인 시대, 화석연료를 태우며 수십만년 지속될 오염물질을 만들어내는 시대, 팬데믹이 전 세계를 휩쓸어버린 시대, 인공지능 탈선을 우려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에 대응할 기술과 지식을 갖고 있기도 하다. 저자는 ‘긴 성찰’에 기반한 장기주의가 문제 해결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1961년 소련에서 개발한 수소폭탄 ‘차르 봄바’ 폭발 실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퀘이커 교도들이 최초로 노예제도를 공개적으로 비난한 것은 1688년이었고, 대영제국 노예제 폐지법은 1833년에 통과됐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여성의 권리>를 출판한 것은 1792년이지만, 미국과 영국이 여성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준 것은 1920년과 1928년이다.

다행히도 최근 세계는 미래 세대의 안위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독일에서 녹색당이 수십년 운동 끝에 1998년 독일 연립정부에 참여했고, 2000년 태양광 산업 성장을 뒷받침하는 획기적 법안을 도입했다. 2000년부터 2020년까지 태양전지판 가격은 92% 하락했다. ‘인공지능 안전’ 아이디어가 비주류 중 비주류인 문제에서 기계 학습 내의 가치를 인정받는 분야가 되어가고 있다.

에너지 수요 증가, 강대국 간 전쟁 위협, 인공지능이 조장하는 글로벌 전체주의 위험을 줄이며 동시에 지속적인 기술 진보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를 위해 행동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저자는 말한다.

이런 운동은 어떤 사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까? 당신이 아니라면 누구겠는가? … 문명을 디스토피아나 사멸로부터 구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성공할 운명을 타고난 것이 아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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