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 그는 이미 '힙'했다…습작·에칭·수채화에 '3단 심쿵'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展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서 8월20일까지
(서울=뉴스1) 김일창 기자 = 2012년 겨울,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대규모 회고전이 프랑스 파리에서 열렸다. 전시가 열린 파리 중심가 대형 행사장인 그랑팔레(Grand Palais) 앞은 추운 날씨에도 전시를 보려는 관람객들로 연일 북적였다. 이런 관람객들의 성원에 프랑스에서는 보기 드물게 전시는 연장됐다. 콧대 높은 파리지엥의 마음을 호퍼가 훔친 격이다.
10년이 흐른 2023년 봄 서울, 호퍼가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10년전 파리처럼 열기가 대단하다. 사전 입장권 10만장은 일찍이 동이 났다. 지난 20일부터 판매되어 구입이 완료된 일반 입장권 3만장까지 합하면 이미 13만명이 호퍼를 보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지난 2019년 열린 '데이비드 호크니'전(展)의 관람객 수 30여만명도 넘어설 것이란 전망이다.
이같은 호퍼의 인기는 어디에서 올까. 여러 요소가 있지만 색감과 구도가 첫손에 꼽힌다. 두 요소가 최적의 조화를 이루면서 호퍼 특유의 쓸쓸함과 적막감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특히 호퍼가 바라보고 선택한 작품의 구도는 당시에는 잘 볼 수 없는 것이었다. 100여년이 흐른 지금, 이 구도는 일반인들에게 어느 작가의 구도보다 세련되고 미학적으로 다가온다.
호퍼는 이른바 그림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캔버스 중심에 두지 않았다. 미술의 역사가 시작한 이래 모든 그림의 주제는 화면의 중심이거나 최소한 중심부에 있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0년경)에서 주인공은 누가 봐도 작품 한 가운데 서 있는 비너스이다.
이런 화면 중심주의에서 탈피를 시도한 사람이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이다. 그의 대표작 '압생트 한 잔'(1876년)은 술집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성과 정면을 멍하니 바라보는 한 여성을 화면 우측 상단에 배치했다.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중심부에서 멀어져 있지만 작품은 오히려 더 적막한 느낌이다.
드가의 1886년작 '욕조'는 더욱 충격적이다. 이 그림은 마치 납작한 욕조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성을 그린 왼쪽 부분과 주전자와 빗 등이 놓여 있는 오른쪽 선반 부분이 별개로 보일 정도이다. 여성의 얼굴을 완전히 가린 것도 인상적이다.
드가의 구도는 툴루즈 로트레크(Toulouse Lautrec, 1864~1901)가 이어받는다. 그의 작품 '물랭 루즈에서'(1892)는 이리저리 뒤엉킨 구도가 관람객에게 쉴새 없는 시점의 이동을 끌어낸다. 우측 하단의 여성과 좌측의 가로지르는 테이블, 그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사람들과 더 위에 두 명의 여성과 남성들까지. 그러나 젊음의 열기로 가득할 클럽 '물랭루즈'에 있는 사람들치고는 모두 무표정한 얼굴이다.
호퍼는 이보다 한발 더 나아간다. 호퍼가 파리에 머물 때 지내던 아파트 계단을 그린 '파리 릴 48번가의 계단'(1906)이 대표적이다. 그는 왜 이 구도와 장면을 선택했을까.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가난한 여행자가 머물렀다면 분명 저층보다는 고층일 확률이 크다.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운 이 회전형 계단을 호퍼는 자주 오르고 내렸을 것이다. 그때마다 삐그덕거리는 나무 소리도 들었을 것이고, 지쳐서 계단 어디에선가 잠시 쉬었을 수도 있다. 그 찰나의 쉼에 고개를 드니 보인 풍경이 바로 이 풍경이었을 수 있다.
'통로의 두 사람'(1927), '밤의 창문'(1928), '황혼의 집'(1935) 등도 당시에는 잘 택하지 않았을 구도로 그려진 그림이다. '밤의 창문'은 마치 멀리서 망원렌즈로 당겨서 찍은 사진과 같은 구도다. 환한 방 안에 있는 여성의 아주 부분적인 뒷모습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황혼의 집'도 멀리서 당겨서 찍은 사진과 같은 모습이다. 사람은 좌측 하단 한 창문에 기대어 있는 듯한 한 명이 전부이다. 호퍼는 '이른 아침'(1930, 미출품)이라는 작품에서 사람이 없는 상가 건물 정면을 그렸다. '황혼의 집'과 '이른 아침', 시간대와 사람의 유무 등의 차이가 있지만 적막감은 고스란히 전달된다.
드가에서부터 이어진 이런 과감한 구도는 100년이 지나서야 보다 적극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특히 사진에서 이런 경향이 뚜렷한데, 이는 비단 작가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의 사진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당대에도 많은 사랑을 받은 호퍼가 현재 더 큰 사랑을 받는 것은 이같은 그의 안목이 현재의 시대와 맞아떨어진 측면이 크다.
호퍼의 이런 과감한 구도는 한 인간에 대한 궁금증으로 이어진다. 호퍼는 어떤 사람이었길래 이렇게 도시인의 고독과 적막을 잘 표현할 수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 말이다. 이번 한국전에 그의 대표 유화들이 빠졌음에도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일반적으로 작가의 습작이나 에칭 판화, 수채화, 아카이브는 관람객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 하지만 한 작가를, 더군다나 작고 작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놓쳐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 이번 호퍼전에 전시된 해당 작품과 자료들은 그를 이해하는데 충분한 도움을 준다.
완성된 유화 작품이 정성 들여 준비한 대형 콘서트의 무대라면, 습작은 길거리에서 이뤄지는 버스킹, 또는 술집에서 이뤄지는 즉흥 공연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습작에는 자연스러움과 편안함이 뭍어 있다. 호퍼의 습작은 특히 그의 감수성이 고스란히 전달될 만큼 차분하다. 습작에도 빼놓지 않은 서명, 그 서명이 모두 조금씩 차이를 보이는 것도 감상 포인트이다.
호퍼는 스스로 "에칭을 시작한 뒤부터 내 그림은 구체화되어 가는 듯했다"고 할 만큼, 에칭은 그의 예술세계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전시장 한쪽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그의 에칭 작품은, 흑백으로 진한 여운을 풍긴다.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을 위에서 바라본 것(밤의 그림자)이나 무대를 바라보는 뒷모습의 두 사람, 방에 앉아 있는 여성의 쓸쓸한 뒷모습(열려있는 창문) 등 그의 대담한 구도는 에칭에서 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느낌이다.
수채화는 호퍼의 작품에서 잘 언급되지 않지만, 그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유화 작품보다 오히려 더 호퍼스러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호퍼의 수채화에는 사랑스러움과 따뜻함, 편안함 등 '힐링' 요소가 모두 함축돼 있다.
호퍼는 과묵했지만 섬세하고 정교한 사람이었음이 느껴지는 건 그가 어머니에게 쓴 편지의 필기체에서 드러나는 정갈함 덕이다.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그리기 위해 그가 얼마나 세세한 것까지 생각하고 계산했음을 '작가노트'(번역 전시)는 보여준다. 호퍼의 적막감과 고독은 감성이 아닌 이성의 결과물일 수도 있는 셈이다.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오는 8월2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열린다.
ickim@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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