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주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요한 밤, 성매매 업소를 찾아온 한 남자. 키가 150cm밖에 안 되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혹시 어린이가 찾아왔나 했지만, 얼굴엔 터럭이 덥수룩했지요. 옷차림도 말끔했고요. “난쟁이구먼.” 내쫓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약간의 동정심이 일었습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들어 오시요.”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매음굴을 찾았습니다. 온천휴양을 하듯 11개월이나 처박혀 있는 경우도 많았지요. “이런 미친놈을 봤나”라고 생각하며 찾아간 방. 그곳엔 온통 물감 냄새가 진동합니다. 모퉁이엔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내가 있었지요. 왜소증을 앓고 있던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이었습니다. 프랑스 탈인상주의 화가 중 대표주자로 뽑힌 그를 오늘 사색합니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입니다.
작은 보석으로 불린 예쁜 아이
로트렉은 귀족 집안의 아이로 1864년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알폰세와 어머니 아델의 사이에서였습니다. 엉뚱하지만 호탕한 성격의 아버지와 아름답고 자상하며 총명한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지요. 분명 기품있고 사랑스런 아이였습니다. 뚜렷한 이목구비의 외모에다 다재다능하기까지 했기에 ‘작은 보석’이라고 불렸지요.
사냥과 스포츠를 좋아했고, 그림을 그리며 소설을 쓰기도 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던 시기, 더 없이 유복한 가정 속에서 로트렉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귀공자였지요. 1878년까지는요.
그해 5월 프랑스 남부 알비 보스크 성에서였습니다. 의자에서 발을 헛디뎌 사고를 당합니다. 오른쪽 다리 골절상이었습니다. 회복은 더뎠습니다. 이듬해 요양차 찾아간 피레네산맥 인근 온천에서 왼쪽 다리까지 골절상을 입었지요. 그때부터 그의 키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습니다.
그의 장애에는 출생의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부모가 사촌지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근친혼이었지요. 뼈가 약하고 부러지면 잘 자라지 않는 농축이골증이라는 유전병이 로트렉의 몸 안에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키는 152cm에서 멈춰 버립니다. ‘작은 보석’이라는 상찬은 ‘작은 신사’라는 일종의 조롱섞인 별명으로 바뀌었지요.
불현듯 찾아온 장애…예술의 열정으로 불태우다
“이제 그림에만 전념하겠어요”
그토록 좋아하는 사냥, 승마를 다시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로트렉. 그는 좌절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아직 그릴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아서입니다. 조금은 낙천적이고 방탕스러운 기질도 도움이 됐을지 모릅니다.
사고를 당한 1878년부터 3년 동안 그는 수백 장의 소묘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취향을 더욱 자유롭게 발전시키고자 파리로 떠납니다. 1882년 3월, 로트렉의 나이 18살이었습니다. 미술사가들은 “로트렉 가문은 장애아를 얻었지만, 미술계는 위대한 화가를 얻었다”는 잔인한 명언을 남깁니다.
화가 르네 프랭스토 밑에서 그림을 공부합니다. 이 시기 그는 파리 서커스장을 방문해 말을 자주 그렸지요. 그가 어릴 때부터 즐겨하던 승마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레온 보나의 문하로 들어갔다가, 코르몽의 아틀리에로 자리를 옮겼지요.
반 고흐와 드가와의 만남
파리에서 그는 세 명의 선생을 만났으나, 별로 배운 것이 없었습니다. 대신 내로라하는 친구들을 만났지요. 반 고흐와 에드가 드가였습니다. 향락적이고 사교적인 로트렉은 자신과 정반대로 매사에 진지하고 이상주의적인 고흐를 예술가로서 인간적으로서도 좋아했지요.
특히 에드가 드가는 로트렉과 참 많이 닮은 화가였습니다. 둘의 관심사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보다 인간을 향했습니다. 춤·경마·서커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역동성에 매료됐고, 이를 화폭에 자주 옮겼지요.
더 많이 교류하고자 작업실을 드가와 이웃한 곳에 새로 옮겼습니다. 환락과 유흥의 중심지, 몽마르트였지요. 로트렉은 이곳에서 예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갑니다.
향락의 도시 몽마르트에서 불 태운 예술혼
1884년 몽마르뜨로 이사를 오기 전까지 로트렉은 사람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조명의 몽마르뜨 영향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개성있고 힘이 넘치기 시작했지요. 당시 몽마르트에는 새로운 형식의 카페, 댄스홀, 캬바레 등이 생겨나고 있었거든요. 그는 어느새 몽마르트가 풍기는 분위기에 매료됩니다. 이를 자신의 새로운 예술의 영감으로 삼았지요.
로트렉은 몽마르트를 썩 좋아했습니다. 겉으론 화려한 몽마르트 무희들에게서 그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번드르르한 겉모습 뒤로 가난한 삶을 살아간 몽마르트의 무희, 귀족 집안의 장애인으로 가족에게서 감춰져야 했던 로트렉. 다른 존재였지만, 같은 아픔을 품고 있었던 셈이지요.
라 굴뤼, 잔 아브릴, 발라동과 같은 당대 최고의 무희들이 로트렉의 ‘뮤즈’였습니다. 재빨리 움직이는 이들의 몸짓을 로트렉은 재빨리 포착해 작품으로 남겼지요. 역동적으로 뛰는 무희들로부터 어쩌면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은 그가 위안을 받았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는 몽마르트의 가난한 서민들의 심정을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서커스 단원들, 뚜쟁이, 타락한 자 등 소외된 사람이 그의 모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올려다봐야 했던 남자”인 로트렉은 몽마르트의 화가로 이름을 알리지요.
매춘부의 일상을 담은 로트렉
그의 작품에 수 많은 영감을 주었던 또 다른 존재는 성매매 여성들이었습니다. 매춘부를 소재로 그린 석판화집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지요.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11개월이나 매음굴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성매매여성들은 로트렉의 뮤즈이자, 조언자, 정부이자 절친한 모델이었지요.
“모델은 박제같다. 하지만 창녀들은 살아 숨쉰다, 난 창녀의 집에 있을 떄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당시 화가들이 창녀를 그리는 방식은 두 가지였습니다. 음란하거나, 혐오스럽거나. 로트렉은 이같은 방식을 거부합니다. 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화가였지요. 창부들을 추하다고 여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미화하거나 이상화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봤던 것입니다. 스타킹을 올리는 여인, 홀로 있는 여인과 같은 매춘부들을 한 인간으로 재현하지요.
동정하려는 연민의 정같은 것도 일절 없었습니다. 손님과 자는 모습, 성병 검진을 받는 모습, 속옷을 벗는 모습, 동성애를 하는 장면까지도 꾸밈이 없었고요. 모든 일상의 것을 그대로 담아냅니다.‘미화’와 ‘악마화’의 가면을 모두 벗겨서 본질을 드러낸 것이지요.
진실한 관찰은 자신에게도 적용됐기에, 그는 불구의 다리와 짙은 수염이 덮인 목을 묘사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의 그림이 “날조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극찬을 받는 배경입니다. 미술사가들은 “그가 산 일생과 그의 예술은 어떤 모순도, 어떤 간격도 없다”고 평합니다.
어쩌면, 장애인인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주는 사람을 갈망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몸에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 반대로 동정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들. 모두가 장애인에 대한 편견어린 시선으로 가득하지요. 그가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 천착한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몽마르트에서 그린 로트렉의 포스터와 판화는 예술의 역사상으로도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합니다. 새로운 석판화의 전통을 기초로 색채감각을 버무려 상업미술의 새 지평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뭉크와 같은 화가들의 영향을 주면서 20세기 예술의 출발점을 제시했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이래서 입니다.
로트렉의 영원한 지지자…어머니, 어머니!
성공과는 별개로 가족들은 몽마르트에 빠져든 로트렉을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알폰세는 “저런 자식 필요없다”면서 의절을 선언하기에 이르렀지요. 어머니 아델 역시 화가라는 직업을 걱정스러워 했지만, 그를 이해하고자 애썼습니다.
자신의 아픔을 그림으로 승화하려는 아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봤던 것이지요. 어머니는 로트렉에게 자주 편지를 씁니다. 머릿말에는 애정이 물씬 묻어나지요. “우리 미래의 미켈란젤로에게.”
로트렉에게 어머니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봐 주는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어머니의 초상화를 여럿 볼 수 있는 이유였지요. 정원 벤치에 앉아서 쉬고 있는 모습, 온실에 한 구석에서 어딘가를 응시하는 모습, 방에서 홀로 독서하는 모습. 다양한 각도에서 어머니를 그려냅니다.
매춘과 음주로 망가져가는 로트렉
로트렉은 서서히 망가져갔습니다. 잦은 매춘과 알콜 중독으로 사달이 난 것이었습니다. 1897년부터는 병원을 수시로 들어가야 하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어머니는 로트렉의 친구 뷔오를 시켜 술을 못 마시게 감시했지만, 그는 기어이 지팡이에 럼주를 숨겨 몰래 마셨지요. 그리고 1901년 그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습니다. 손에서는 경련이 일어났습니다. 죽음이 그를 찾아왔음을 직감합니다.
그는 마지막 한 사람만을 원했습니다. 어머니 아델이었습니다. 150cm의 작은 몸뚱이마저 사랑해주는 유일한 존재. 1901년 9월 9일,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2시. 그가 3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어머니의 품이었습니다.
작은 몸뚱이 위로 어머니의 눈물이 떨어집니다. 어머니에게 그는 위대한 화가도, 난쟁이도 아니었습니다. 매독에 걸린 난봉꾼도, 알코올 중독자는 더더욱 아니었지요. 요람에서 엄마를 보며 환하게 미소 짓던 천사같은 아이 그대로였습니다. ‘작은 보석’이었습니다.
로트렉의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은 어머니 아델
어머니는 그 이후로도 로트텍을 기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1000여점의 데생, 440여점의 판화, 275점의 수채화, 757점의 유화가 모친 앞으로 남겨집니다. 파리 뤽상부르 미술관에 기부의 뜻을 전했지요. 그의 작품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그녀는 바랐습니다. 하지만 미술관은 거부합니다. 보수적인 성향인 탓에 그의 작품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명작은 돌고 돌아 고향인 알비 미술관에 전시됩니다. 어머니 아델은 여기에 기부금을 더했지요. 이 미술관은 이후부터 로트렉 미술관으로 불리게 됩니다. 1913년 어머니 아델도 눈을 감습니다. 그토록 사랑한 ‘작은 보석’이 잠든 곳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위대했던 화가 로트렉, 그보다 더 위대한 어머니 아델을 기억합니다. 이 땅의 모든 장애인과 그들의 위대한 부모님께도 작은 경의를 표하면서.
<네줄요약>
ㅇ19세기 프랑스 탈인상주의 화가 로트렉은 왜소증을 앓고 있었다. 부모가 사촌지간인 근친혼의 결과였다.
ㅇ운동을 좋아했던 로트렉은 낙상 사고 이후, 그림에만 열중했다.
ㅇ몽마르트에서 무희들과 매춘부들의 일상을 그려 사물을 냉철하게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ㅇ어머니 아델은 로트렉의 재능을 응원하고, 일탈도 감싸안았다. 로트렉은 그녀를 평생 사랑했다.
<참고문헌>
ㅇ김연재, 앙리 드 틀루즈 로트렉의 여인상에 나타난 보색심리의 치유적 의미, 미술치료연구 제21권 5호, 2014년
ㅇ박수정, 로트렉의 회화작품의 아르누보적 특성 연구, 2002년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