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정점서 마주한 '최대의 비극'…혈액암 숨기려 가발까지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성수영 2023. 4. 22.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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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밥 아저씨' 밥 로스 (1942~1995)
그림으로 행복을 전한 그의 삶
어록과 함께 만나다


1983년 1월 11일.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던 미국인들의 시선이 공영방송 PBS에 꽂혔습니다. 폭탄 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한 신기한 차림의 웬 아저씨가 팔레트와 붓을 들고 캔버스 앞에서 입을 뗐거든요. “안녕하세요, 밥 로스입니다. 앞으로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The Joy of Painting)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게 됐습니다.” 시청자들이 그의 말과 마법 같은 그림에 푹 빠져드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속삭이는 듯한 그의 독특한 말투는 시청자를 격려하는 것 같기도 했고, 위로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살다 보면 그림을 그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예술가가 살고 있거든요. 이제부터 그걸 끄집어내 캔버스에 담으려 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림을 한 번도 안 그려봐서 못 한다’는 분이 많아요. ‘그림을 그리려면 미대를 나오거나 천재여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보여드릴게요.” 정신을 차려보니 불과 30분 만에 멋진 풍경화가 완성돼 있습니다. “참 쉽죠(That easy)”.

그렇게 전설은 시작됐습니다. 방송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11년간 31시즌, 403회나 이어졌습니다. 한국을 비롯해 전 세계 1억명 이상 시청자들이 밥의 방송을 보며 깊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고요. 밥을 따라 그림을 그리면서 극심한 우울증에서 탈출한 사람이 셀 수 없이 많았고, 94세에 밥에게 배운 그림으로 전시회를 열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 할머니도 있었습니다. 밥은 출연료를 전액 기부하고 수많은 자선활동을 벌여 시청자들의 사랑에 보답했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그의 첫번째 방송 녹화본에는 수많은 감사의 댓글이 달려 있다. "여섯 살 내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 다음날, 너무 슬프고 몸도 아파서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 있었어요. 우리 집엔 세 개의 채널만 나왔는데, 그 중 하나에서 이 방송이 나왔지요. 38년이 지났지만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영원히 이 그림을 기억할 거예요." /유튜브 캡처


1995년 밥이 혈액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밥이 남긴 영상은 유튜브를 비롯한 여러 채널에서 전 세계인에게 진심 어린 위로와 감동을 전하며 미술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미국의 가장 유명한 화가’(뉴욕타임스). 이번 주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밥 로스의 삶을 그가 남긴 아름다운 말들과 함께 소개합니다. 이번 기사에서 큰따옴표(“”) 안에 있는 말은 전부 밥이 방송에서 실제로 했던 말입니다.

 “실수는 없어요. 행복한 우연이 있을 뿐이죠.”

젊은 시절의 밥 로스.


만약 밥이 살아있다면 지금 81살이겠군요. 그는 1942년 플로리다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집안은 넉넉지 못했습니다. 부모님은 밥이 아주 어릴 때 이혼했고요. 밥은 목수인 아버지의 일을 자주 도왔습니다. 방송을 잘 보면 밥의 왼쪽 검지손가락 윗마디가 없는데, 이것도 아버지를 돕다가 벌어진 사고 때문입니다. 학교도 별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불행하지는 않았습니다. 자연 속에서 뛰어놀며 생명에 대한 사랑을 새길 수 있었으니까요. 풍경화를 그릴 때 밥은 늘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온 마음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껴 보세요.”

건실하지만 가난한 미국 청년들이 많이들 그러듯이, 밥은 18세의 나이로 군대(미 공군)에 입대했습니다. 21세 때는 알래스카에 배치돼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과 산을 봤고요. 이후 밥은 20년간 근무하며 상사 계급까지 승진했습니다. 방송에 나온 모습을 보면 상상하기 어렵지만, 밥은 훈련소 교관도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빡세게’ 군기를 잡아 ‘박살 내는 밥’(Bust-'em-up Bobby)이라는 별명도 얻었지요. 하지만 남에게 소리 지르는 건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습니다.

훗날 그는 방송에서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 인생의 절반을 군대에서 보냈어요. 직장은 내게 거친 사람이 되기를 요구했습니다. 전 거기에 신물이 났어요. 다행히도 나에겐 그림이 있었지요. 온종일 일하고 집에 돌아와 캔버스 앞에 서면, 깨끗하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그림 속 세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화난 사람도 없었지요. 캔버스 속에서는 완전한 자유가 펼쳐집니다. 우리 모두 자유를 갈망하잖아요. 적어도 저는 그랬어요.” 

밥 로스가 1971년 접시에 그린 그림. 알래스카의 풍경과 함께 오로라가 그려져 있다. 현재 이베이에 1만5000달러의 가격으로 올라와 있다. /이베이


그는 “다시는 군인이었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군 생활을 하며 본 알래스카 풍경과 그림에 대한 갈망은 그의 마음속 깊이 남았습니다. 인생을 괴롭게 만들었던 여러 경험이 때로는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기도 하는 법이지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여러분 캔버스에 온갖 일들이 일어나는 걸 볼 수 있어요. 실수로 그림을 망쳐버렸다는 건 틀린 말이에요. 우리는 실수를 하지 않잖아요. 행복한 우연(accidents)이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미 캔버스에 그려진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전역 후 바텐더로 일하며 접시에 그림을 그려 판매하던 밥은 어느 날 TV에서 ‘유화의 마법’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습니다. 빌 알렉산더라는 화가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며 직접 그리는 법을 설명해주는, 훗날 밥의 프로그램과 거의 똑같은 포맷의 프로그램이었지요. 당시엔 이런 프로그램이 몇 개 있었습니다.

밥 로스와 빌 알렉산더의 프로그램 비교. 당시에는 이런 프로그램이 많았다.


일반적인 유화는 그림을 그리고 오랜 시간 물감을 말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야 완성되지만, 빌은 알라 프리마(alla prima, 속칭 wet-on-wet)로 불리는 기법을 써서 단숨에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예전에도 있었던 기법이긴 했지만 밥은 빌의 프로그램에서 처음으로 이 기법을 배웠지요.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저거야!” 밥은 이렇게 소리쳤다고 합니다. 밥은 그 길로 빌을 찾아가 그림을 배운 뒤 그의 밑에서 일하는 그림 선생님 겸 외판원이 됐습니다.

 “연습할 의지만 있으면 재능은 쌓을 수 있어요.”

밥 로스의 전형적인 풍경화. 설산과 함께 물과 덤불, 나무가 등장한다. 나무를 그릴 때 밥은 자주 "행복한 작은 나무들(happy little trees)"이란 말을 했다.


머지않아 밥은 빌에게서 독립해 직접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무명이었던 밥이 이름을 알리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수강생 부족으로 강의가 폐강되기도 했고, 돈이 없어서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가 특유의 폭탄 머리를 하게 된 것도 이때입니다. 머리를 자르고 손질할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밥은 지칠 줄 몰랐습니다. 사람들에게 평소 얘기했던 것처럼요. “제일 중요한 건 즐기는 거예요. 행복한 일을 하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우여곡절 끝에 밥은 공영방송 PBS에서 그림 그리기 방송을 따냈습니다.

방송을 시작한 후에도 밥은 강행군을 이어갔습니다. 세트장을 마련할 짬도 안 나서 배경 역할을 하는 검은 커튼과 세 대의 촬영 카메라가 방송 세트의 전부였지요. 방송 시간은 28분으로 그리 길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집중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밥은 하루에 방송을 2~3개씩 촬영하곤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여유가 넘쳤습니다. 방송 시간이 2분 남았다는 신호를 받을 때마다 밥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 스태프들은 싫어해도, 지금부터 큰 나무를 하나 그려야겠어요. 계획 없이요. 인생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 이런 거잖아요.”

힘든 일정에도 밥이 여유와 웃음을 잃지 않았던 건 자신의 방송을 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덕분이었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지요. “쇼핑몰에서 그림 시연회를 하는 데 어떤 남자분이 이렇게 얘기하더군요. ‘밥, 나는 색맹이라서 절대 그림을 그릴 수 없어요. 나는 색맹이고 회색 색조만 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회색만을 가지고 그림을 그려볼 거예요.…(중략)…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게 정말 멋지지 않나요. 대단한 비법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저 꿈만 품으시면 됩니다.

해당 에피소드(시즌 2 에피소드 4)에서 밥이 그린 그림.

밥은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즐거움과 감동을 주기 위해 여러 애를 썼습니다. 속삭이는 듯한 특유의 말투도 진심을 잘 전달하기 위한 연구와 연습의 결과물이었지요. 캐릭터를 위해 특유의 헤어스타일과 수염, 청바지와 셔츠 차림을 유지했고요. “재능은 지속적인 관심과 같아요. 그러니까 연습할 의지만 있다면 재능도 쌓을 수 있습니다.” 밥의 ‘엔터테이너로서의 재능’이 불러온 효과는 너무 좋아서 수많은 열성 팬이 늘 따라붙었습니다. 셔츠 한 조각이라도 간직하려는 팬에게 옷을 찢기는 일도 다반사였고요.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심장마비도 한 번 겪었고요. 편두통도 심했습니다. 사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여러 문제를 맞닥뜨리기도 했고, 판매하는 물감의 성분부터 붓의 크기까지 세세하게 신경 써야 하는 일도 참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항상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습니다. “걱정하는 데 인생을 허비하지 마세요. 여유를 가지고, 흘러가는 대로 하면 돼요(Take life easy, just let it go).” 이런 삶의 철학이 밥의 언행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서였을까요. 그의 인기는 가파르게 높아졌습니다.

 행복했던 남자

밥이 나온 '그림 그리기의 즐거움' 마지막 방영분. 가발과 화장으로 아픈 기색을 숨기며 촬영했다.


인기가 정점에 오른 순간, 밥은 인생 최대의 비극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1992년 사랑하는 아내를 암으로 잃은 것입니다. 아들은 훗날 이렇게 회고했지요. 평생 긍정적이었던 아버지가 바닥에서 웅크리고 우는 걸 처음 봤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밥이 림프종(혈액암)을 진단받고 병세가 급격히 악화된 것도 분명 아내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겁니다.

아내를 잃은 후 방송에서 밥은 슬픔을 삼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내를 잃은 후 여러 시청자께서 보내주신 관심과 위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림에는 상반되는 요소가 필요합니다. 빛에 빛을 더해봤자 아무것도 생기지 않지요. 어둠에 어둠을 더해도 그렇고요. 어둠과 빛, 빛과 어둠이 이어지는 식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슬픔을 겪어야 나중에 오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지금, 기쁨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하지만 암은 이미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퍼져 있었고, 밥에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시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최대한 하기로 했습니다. 병색을 숨기기 위해 가발을 쓰고 화장을 해가면서도 하루에 3개 이상 방송을 찍으며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캔버스에는 무한한 힘이 들어 있어서 말 그대로 산을 움직일 수도 있습니다. 할 수 있다고 믿으세요. 정말로 할 수 있으니까요.”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밥이 하고 싶어 했던 건 어린이를 상대로 한 미술 프로그램이었습니다. 그림을 배운 어린이들은 어른이 돼서도 미술을 버팀목 삼아 굳세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밥은 믿었으니까요. 하지만 야속하게도 병은 급속하게 진행됐고, 밥은 꿈을 못다 이루고 1995년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밥 로스가 마지막까지 만들고 싶어 했던 어린이 프로그램. 병세가 너무 깊어 실제로 출연하지 못하고 영상으로만 잠깐 등장해야 했다.


미술계는 밥의 그림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무시했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 있지만 사실은 ‘별 관심이 없었다’에 가깝습니다. 밥은 미술계에서 작품을 판매하는 전업 작가가 아니라 미술 교육자이자 방송인이었으니까요. 다만 밥이 “당신 작품이 미술관에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냐”는 짓궂은 질문을 받은 적은 몇 번 있습니다. 밥은 늘 이렇게 답했지요. “글쎄,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적어도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아닐 거에요. 내 작품은 전통적인 예술이나 순수 예술이 결코 아니고, 나도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하지만 인생은 모르는 겁니다. 2019년 스미소니언 박물관이 밥 로스의 소장품과 함께 그림 몇 장을 영구 소장키로 결정했거든요. 오늘날 밥은 유화에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도운 공로를 인정받아 미술계에 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순수미술을 전시하는 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수만 명의 관객이 찾아오는 게 그 방증입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 권위 있는 영국의 미술 잡지 프리즈는 이렇게 표현했지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가 마침내 미술계의 인정을 받았다고.

“참 쉽죠”라며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줬던 밥. 정작 본인의 삶은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영광의 정점에서 생을 마쳐야 했지만, 그는 분명 행복했을 겁니다. 그의 말대로,자신이 보는 세계를 여러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니까요.

그래서 이번 주 제가 독자분들께 보내는 인사는 밥이 남긴 말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 매주 이렇게 안방으로 초대해 주시는 덕분에 이렇게 시간을 함께할 수 있네요. 제가 얼마나 그 사실을 감사하게 여기는지 여러분은 모르실 거예요. 여러분은 저의 소중한 친구가 되셨습니다. 제가 그리는 그림들이 여러분의 인생에 작은 즐거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항상 행복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참고자료) 이 기사에 담긴 정보 대부분은 ‘Bob Ross: The Happy Painter’(PBS, 유튜브)와 ‘밥 로스: 행복한 사고, 배신과 탐욕’(넷플릭스) 등 다큐멘터리 영상 두 편,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밥 로스의 방송 내용들을 참조했습니다. 밥의 동업자들이 그를 상업적으로만 이용했다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의 주장에 대해서는 반론 기사 ‘Bob Ross Inc. Would Love It If You Stopped Hating Them’(Vanity Fair)이 있으니 독자 여러분께서 종합적으로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 밖에 Where Are All the Bob Ross Paintings? We Found Them (NYT), WHY IS BOB ROSS STILL SO POPULAR? (Atlantic), The enduring popularity of artist Bob Ross (CBS), What the Art World Can Learn from Bob Ross(Frieze) 기사를 참조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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