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인디언 강변 마을을 미국의 보르도로’ 나인 햇츠 멜롯
독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Jaspers)는 기원전 9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를 인류 역사에서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정의했다. 세계의 주요 종교와 철학이 이 시대에 등장해 지금까지 인류 사상사의 중심, 말 그대로 ‘축’을 이뤘기 때문이다.
신대륙 와인, 특히 미국 와인 업계에서 199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는 30여 년은 전 세계 와인 역사를 주름잡았던 수많은 유명 와인 양조가들이 이름을 빛냈던 시기다. 미국 와인 ‘축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와인 양조가들 뿐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호주에서 내로라하는 와인 거물들이 미국으로 몰려들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양조가 미셸 롤랑과 호주 국보 와인 ‘펜폴즈’를 만드는 존 듀발, 보르도 최고가 와인으로 알려진 샤토 페트뤼스를 거쳐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다나에스테이트를 총괄한 필립 멜카, 칠레 최고의 와이너리 콘차 이 토로를 이끌던 아구스틴 후니우스 시니어처럼 전설적인 양조가들이 일제히 미국으로 향했다.
이들이 주목한 곳은 미국 최대 와인 산지 캘리포니아가 아니었다. 캘리포니아 와인은 이미 1976년 ‘파리의 심판’ 이후로 유럽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이들은 당시 캘리포니아보다 훨씬 덜 알려졌던 워싱턴주(州)에 주목했다.
워싱턴은 미국 본토 북서쪽 끝에 자리 잡은 주다. 이름 때문에 미국 동쪽에 있는 수도 워싱턴D.C(District of Columbia)와 자주 혼동한다. 미국 사람들조차 ‘워싱턴’ 하면 이 주보다 수도를 먼저 떠올린다는 농담이 돌 정도다.
우리나라에서는 워싱턴에서 가장 큰 도시 시애틀이 ‘스타벅스의 고향’ 혹은 ‘아마존과 마이크로소프트 본사가 자리 잡은 곳’ 정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워싱턴의 진가는 자연환경에서 드러난다. 시애틀은 날이 흐리고 비가 많이 오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시애틀 동쪽으로는 연간 300일 이상 맑은 날이 이어진다. 워싱턴주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캐스케이드(Cascade)산맥 때문이다.
산맥 서쪽과 달리 동쪽은 사막에 가까운 건조한 기후다. 높은 산맥이 서쪽에서 부는 습한 바람과 비구름을 막아 여름 내내 일조량을 보장한다. 이 지역 위도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 고급 와인 산지 보르도와 비슷하다.
시애틀에서 처음 설립한 와이너리 ‘샤토 생 미셸(Chateau Ste. Michelle)’에서 일했던 앨런 슙(Allen Shoup)은 이 점에 주목했다. 워싱턴 서부는 보르도와 기후는 비슷하지만, 훨씬 광활한 땅이 미개척지로 남아있었다. 중세부터 귀족들이 밭고랑 단위로 경계를 그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와는 포도 재배 환경이 확연하게 달랐다.
슙은 직접 전설적인 양조가들을 워싱턴주로 불러 모았다. 그가 처음 손을 잡은 곳은 이탈리아 안티노리 가문이었다. 안티노리 가문은 700년 동안 26세대가 와인을 만들어 온 이탈리아 와인 명문가다. 우리나라에서도 티냐넬로(Tignanello)로 유명하다.
1995년 슙이 이들과 함께 만든 와인 ‘콜 솔라레’는 시장에 나오자마자 평론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첫 작품이 성공하자 곧 두 번째 작품 ‘에로이카 리슬링’가 나왔다. 이번에는 독일 모젤 지역에서 첫손에 꼽히는 생산자 에른스트 루젠과 함께했다.
미국 내에서도 와인 생산지로 인지도가 떨어졌던 워싱턴주는 그가 샤토 생 미셸에서 일하는 20년 동안 캘리포니아에 이어 생산량으로 두 번째인 유명 와인 산지로 거듭났다. 인디언 말로 ‘물이 줄기차게 흐르는 곳’이라는 뜻이었던 와인 산지 왈라왈라(walla walla)밸리 역시 그의 손에서 평론가들이 높은 점수를 주는 와인이 쏟아지는 ‘미국의 보르도’로 다시 태어났다.
슙은 2002년 직접 본인 손으로 와이너리를 세웠다. ‘롱 쉐도우(Long Shadows)’의 시작이다. 워싱턴주가 유명 와인 양조가들 발길을 본격적으로 끌어 당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앞서 안티노리 가문과 루젠의 성공을 본 세계적인 와인 양조가들은 슙의 부름에 망설임 없이 응답했다. 보통 이들은 와인 컨설팅 비용으로 한 번에 보통 수십만에서 수백만 달러를 받는다. 미셸 롤랑은 전 세계 와이너리를 하루 단위로 쪼개 떠돌아다닌다 해서 ‘플라잉 와인 메이커’라는 별칭까지 붙을 만큼 바쁜 일정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들은 슙이 이끌던 롱쉐도우에 ‘워싱턴에서 나만의 와인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참여를 마다하지 않았다. 워싱턴이 주는 독특한 자연환경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롱 쉐도우에 합류한 랜디 던은 미국 최고 와인 산지로 꼽히는 나파밸리의 스타 와인 양조가다. 그의 손에서 나온 케이머스와 팔메이어는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의 기준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던은 2000년대 초 무명이던 롱 쉐도우에 참여하면서 “워싱턴주에서 키운 카베르네 소비뇽은 나파밸리 카베르네 쇼비뇽과 전혀 다르다”며 “이 지역 카베르네 소비뇽에서는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에서 결코 느낄 수 없는 찔레꽃 향과 강렬한 참나무 향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없던 워싱턴주에 그야말로 ‘와인 올스타’를 불러 모았던 슙은 지난해 79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워싱턴주 유력지 시애틀타임즈는 슙을 기리며 한 면을 털어 작성한 부고에서 “워싱턴 와인 산업을 세계 무대로 끌어올린 단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나인 햇츠(9 Hats)는 합리적인 가격에 롱 쉐도우 와인이 주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와인이다. 이 와인은 슙의 뒤를 이어 롱 쉐도우를 이끄는 총괄 와인 메이커 질스 니컬트(Gilles Nicault)가 만든다. 나인 햇츠라는 이름도 슙이 모았던 와인 어벤져스 9명을 모자 9개에 빗대 지은 이름이다.
나인 햇츠 슬로건은 ‘하루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에브리데이 와인’이다. 롱 쉐도우 와인이 1병에 100달러를 오간다면 나인 햇츠 와인은 훨씬 부담이 덜한 25달러 정도다.
나인 햇츠 멜롯은 워싱턴주를 상징하는 메를로 품종 포도로 만들었다. 메를로는 가장 유명한 레드 와인 품종 카베르네 소비뇽에 비해 타닌이 적고 산도가 낮지만 과일 느낌이 풍부한 편이다. 이런 특징 덕분에 메를로는 ‘부드럽다, 원숙하다, 우아하다’란 평이 다수다.
이 와인은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 레드와인 신대륙 부문에서 베스트 오브 2023을 받았다. 수입사는 와인투유코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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