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의 ‘수상한 부자 친구’...고액 스폰 스캔들로 미 대법원 '휘청'
호화 별장·제트기·요트 지원받고 신고 안해
친구 사이라 괜찮다?...흔들리는 공직자 윤리
매년 여름이면 억만장자 친구 소유의 호화 별장을 찾았다. 일상이 무료할 땐 친구의 제트기를 타고 세계 어디로든 날아갔고, 대형 요트를 친구에게 빌려 부부동반 여행도 다녔다. 20여 년간 모든 비용을 친구가 댔다.
미국 보수를 대표하는 클래런스 토마스(74) 대법관의 이야기로, 그는 대법관 신분으로 공짜 호화여행을 즐기고도 정부에 보고하지 않았다. '법과 정의의 보루'여야 할 대법관이 부패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면서 대법원의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대법원은 미국 최고의 사법기관으로, 미국 사회를 좌지우지한다.
'보수 중의 보수' 대법관, 공화당 '큰손'과는 무슨 사이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1991년 취임한 토마스 대법관은 미국 사상 두 번째 흑인 대법관으로, 대법관 9명 중 취임한 지 가장 오래돼 입김이 세다. 지난해 대법원이 여성의 임신중지권을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49년 만에 뒤집었을 때 그는 피임의 자유와 동성애·동성혼에 대한 판례도 폐기해야 한다는 보충 의견까지 남겼다.
토마스 대법관의 ‘비밀 친구’ 역시 보수성향이며 공화당에 1,300만 달러(약 172억7,700만 원) 이상을 기부한 ‘큰손’이다. 이달 초 미국 탐사보도매체 프로퍼블리카는 토마스 대법관 부부가 부동산업자인 친구 ‘할란 크로’에게 여행 접대를 받고 이를 은폐했다고 폭로했다.
토마스 대법관은 크로의 텍사스 농장, 뉴욕 애디론댁 산맥의 개인리조트에서 매년 휴가를 보냈고, 정·재계 남성 사교모임인 보헤미안 클럽 캠핑에도 초대받았다. 프로퍼블리카는 “2019년 크로의 전용기와 호화요트를 타고 떠난 인도네시아 부부동반 여행에 토마스가 스스로 비용을 댔다면 50만 달러(약 6억6,000만 원) 이상이 들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프로퍼블리카는 2014년 크로의 회사가 토마스 대법관 소유의 낡은 단층집을 매입했으나 이 부동산 거래 기록이 없다는 사실도 보도했다. 토마스 대법관의 배우자가 운영하던 정치 컨설팅 회사에 크로가 50만 달러를 투자했다는 2011년 폴리티코 보도도 다시 화제가 됐다. 공직자 감시 비영리단체 ‘크루’의 버지니아 캔터 변호사는 “대법관 부부에게 현금을 지급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개인적 환대' 선물은 보고 안해도 된다?...공직자 윤리 논란
미국 정부윤리법에 따라 판사, 의원, 연방공무원과 배우자들은 금융 상태와 외부 소득을 신고해야 한다. 판사는 415달러 이상의 선물을 보고해야 하며, 업무 관련인에게는 어떠한 선물도 받을 수 없다.
토마스 대법관은 성명에서 “법원과 관련이 없는 사람과 주고받는 호의에 대해선 신고 의무가 없다”는 논리로 맞섰다.
실제 법엔 구멍이 있다. ‘개인적 환대’로 받는 선물은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 워싱턴포스트(WP)는 “환대의 범위가 지나치게 모호한 게 문제”라며 “대법원 권력에 대한 견제 실패”라고 평했다.
크로의 접대 목적이 순수한 개인적 환대 이상이었다는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크로는 대법원에 출석한 적이 없다고 해명했지만, 그가 이사로 재직했던 보수단체 중 최소 3곳은 대법원 재판에 관여했다. 영국 가디언은 “친기업 성향의 싱크탱크 미국기업연구소는 2001년 크로를 통해 토마스 대법관에게 1만5,000달러 상당의 조각상을 선물했다”고 보도했다.
토마스 대법관의 자진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민주당 소속의 리처드 더빈 상원 법제사법위원장은 “토마스 대법관의 윤리 위반 혐의에 대한 청문회를 열겠다”고 18일(현지시간) 밝혔다. 그러나 연방대법관은 종신직이어서 사망이나 탄핵이 아니면 스스로 물러나게 할 수 없다. 미국이 3권 분립을 강도 높게 보장하는 만큼 행정부나 의회가 대법관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다. 이번 스캔들이 흐지부지된다면 대법원의 권위가 추락해 미국의 분열을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
이유진 기자 iyz@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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