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뻔히 닥칠 문제 미루고 외면한 정부·국회, ‘전세 사기’뿐 아니다
전세 사기 피해자 3명이 잇달아 극단적 선택을 하자 정부, 정치권, 지자체에서 경매 중지, 전세 대출 이자 지원, 피해자 구제 특별법 검토 등의 각종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피해자들은 “작년부터 도와 달라 애원해도 만나주지도 않더니” “사람이 죽고 나니까 이제야 들여다봐 준다”라며 기막혀 하고 있다 한다.
인천 전세 사기 사건의 첫 희생자가 나온 것은 지난 2월 28일이었다. 전셋집이 경매에 넘어갔고 선순위 근저당권이 설정돼 있어서 보증금 7000만원을 한 푼도 못 건진 세입자였다. 정부가 현재 검토 중인 대책을 그때 강구했다면 제2, 제3의 불행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피해자 단체와 시민단체 등에서 경매 중지를 지속적으로 요청했지만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가 세 번째 희생자가 나온 다음에야 늑장 대응을 했다.
문재인 정부가 힘든 개혁 과제는 모조리 뒤로 미뤘다면 윤석열 정부는 뻔히 닥쳐올 문제에 안이하게 대응하다 화를 키우고 있다. 작년 9월 레고랜드 사태가 불거졌을 때 두 달 이상 방치하다 채권시장이 마비되고서야 50조원을 쏟아붓는 긴급 대책으로 불을 껐다. 반도체법도 세액 공제 혜택을 대폭 줄인 법을 통과시켰다가 대통령이 질책하자 부랴부랴 재개정했다. 한국전력이 작년에 32조원 적자를 낸 걸 뻔히 보고서도 전기료 추가 인상을 한없이 미루고 있다.
시급한 연금 개혁도 입으로만 떠들고, 구체적 청사진 제시는 계속 미룬다. 사교육 경감 대책이나 재정 준칙 제정 등 공언한 정책도 속도를 내지 않고 있다. 정부는 여소야대 국회 핑계를 대지만, 전세 사기 대책, 레고랜드 사태, 전기료 인상 등은 정부 단독으로 얼마든지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문제들이다.
국회도 같은 책임을 져야 한다. 피해자들이 계속 호소했지만 국회는 관련 법 개정 작업에 손을 놓고 있었다. 국토부가 지난 2월 전세 사기 방지를 위해 제출한 13개 법 개정안 중 5개는 아직 상임위 문턱도 넘지 못했다. 문제가 커지자 여야는 서로 남 탓하기 바쁘다. 여당은 문 정권의 부동산 정책 실정과 임대차 3법 탓이라고 비난하고, 국회를 장악한 야당은 특검 등 정치 공세에 필요한 입법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국회에서 모든 대책이 멈추고 진전이 되지 않는 일이 거듭되자 공무원들은 체념하다 못해 집단 무기력증에 빠져 선제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조차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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