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한국적’이란 단어는 다시 부끄러운 말이 되는가
혁명밖에 代案 없으면 불행, 혁명도 不可能하면 더 불행
국가 이미지 변화는 개인의 이미지 변화와 비슷한 곡선을 그린다. 활기차게 뻗어갈 땐 모든 게 장점처럼 빛나 보인다. 그러다 기세가 고꾸라지면 장점은 하찮고 시들해지며 단점은 확대돼 눈앞에 다가선다. K팝·K시네마·K드라마·K클래식 등이 세계 무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자 한국 단점조차 장점인 양 몸값이 올랐다. 무법(無法)과 무질서를 활기(活氣)로, 무례(無禮)를 친근감으로, 기초(基礎) 다지기를 건너뛰는 건성건성과 대충대충을 한국식 속도감으로 예찬하는 외국인의 입발림 칭찬에 어깨를 으쓱거리는 모습이 드물지 않다.
대문자 ‘K’는 ‘한국적’이란 단어로 바꿔 낄 수 있다. 사실 ‘한국적’이란 낱말은 오랜 세월 ‘불명예스럽고’ ‘부끄럽고’ ‘감추고 싶은’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독재를, ‘한국적 시장경제’는 정치와 기업이 결탁한 천민(賤民) 자본주의를, ‘한국적 시간 관념’은 약속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코리안 타임(Korean time)이란 뜻이었다. 정치 행사, 각종 관청의 민원 처리 과정에서 밥값·떡값 명목으로 돈 봉투를 호주머니에 찔러주는 행태도 ‘한국적 관행’으로 여겨졌다.
지금 한국 구청과 동사무소 민원 서류 발급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투명하다. 심지어 시골 고등학교 졸업증명서까지 떼 준다. IT 기기의 광범위한 보급이 속도를 세계 최고로 높였다. 그럼 그곳의 돈 봉투는 언제 어떻게 사라지고 투명성을 확보하게 됐을까. 부정을 적발하는 검사와 경찰과 감사원 인원을 몇 배 늘렸기 때문일까.
천지개벽(天地開闢)은 1960년대 중반에 시작된 경제 발전의 열매가 열리면서 찾아왔다. 이 대목에선 경제라는 하부(下部) 구조가 의식과 행동이란 상부 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지적이 정확했다. 경제 발전으로 공무원들에게 안정된 중산층 생활이 가능한 급여를 주자 돈 봉투가 뜸해졌다. 퇴직자를 위한 공무원 연금 제도가 정비되면서 돈 봉투의 유혹에 넘어가 노후를 망치는 경우는 급감(急減)했다. ‘한국적’이란 단어에 붙어 다니던 100년 묵은 불명예(不名譽)는 이렇게 떨어져 나갔다. 피겨스케이팅에서 김연아가 보여준 공중 도약(跳躍)보다 더 기적 같은 도약이었다.
그 기적이 무너지고 있다. ‘단어’의 운명은 때로 예언자의 계시(啓示)처럼 나라의 미래 모습을 그려준다. 요즘 ‘한국적’이란 단어는 예전의 ‘불명예스럽고’ ‘부끄럽고’ ‘감추고 싶던’ 그 감옥에 다시 수감(收監)되는 길을 걷고 있다. ‘한국적 민주주의’는 정체(停滯)·혼란과 동의어(同義語)가 돼 간다. ‘세계 역사상 최저’라는 한국적 출산율 절벽은 사라지는 국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총장·학장 직선제(直選制)에 오염된 대학은 하향(下向) 평준화를 향해 미끄러진다.
거짓을 꾸며 수사 기관에 고소·고발하는 무고(誣告)와 법정에서 허위 증언 하는 위증(僞證), 사기(詐欺) 유형과 건수 역시 세계 최고에 가깝다. 무고·위증·사기를 뭉뚱그리는 밑돌이 ‘거짓말’이라는 단어다. 도산(島山) 안창호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거짓말은 말자’며 목이 쉬도록 외쳤던 100년 전 세태로 퇴보하고 있다.
국민이 가진 장점을 최대한으로 발휘시키면 나라는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선다. 잘나가던 시대에 장점에 가려 있던 단점이 무더기로 노출되면 나라는 회복(回復) 불능 상태로 주저앉는다. 정치는 장점이 발휘되도록 촉진하고, 단점이 노출되지 않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위대한 정치는 국민 단점조차 장점으로 기능(機能)하게 만든다. 아데나워와 드골은 독일과 프랑스 국민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꿔 꽃으로 피어나게 한 지도자다. 국민 단점을 정권 유지, 정권 탈취를 위해 이용하는 정치는 최악의 정치다.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거짓말은 이제 새 소식이 아니다. 그가 참말을 하면 ‘몇 년 만의 참말’이라고 그게 뉴스가 되는 현실이다. 민주당은 전당대회 300만원짜리 돈 봉투는 밥값일 뿐이라며 그게 무슨 대수냐고 대놓고 떠든다. 50년 전 동사무소만도 못한 상태로 퇴행(退行)했다. 집권 세력은 구약(舊約) 속 이사야를 자칭하는 목사에게 휘둘리면서 무력(無力)하고 무대책(無對策)인 상태로 총선에서 “이재명이란 요행(僥倖)”이 작용하기만 기대하며 국민과 멀어지고 있다.
‘국민밖에 희망이 없다’는 말은 절망스럽다는 뜻이다. 혁명밖에 대안(代案)이 없는 정치는 불행한 정치다. 그러나 혁명조차 불가능한 정치는 더 불행한 나라를 만든다. 발밑이 무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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