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밭 사이로 ‘꼬닥꼬닥’ 걸으멍, ‘빙삭이’ 웃으멍… 초록 물 드는 시간
4월의 제주 가파도 여행
“보리는 어느 정도 자라서 바람결 따라 파도처럼 넘실거릴 때가 가장 보기 좋아요. 3월부터 4월 초까지는 초록빛은 좋긴 해도 보리가 웃자라지 않아서 ‘청보리 파도’를 보긴 어렵고, 사실 4월 중순부터 말까지가 가장 예뻐요. 5월 중순쯤에는 슬슬 보리를 수확하기 시작하니 청보리 보러 오려면 지금이 딱이지~.”
가파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이자 나이로만 따지면 이 섬의 서열 4위라는 가파도마을회 김부전(85)씨의 말. 제주 가파도 여행은 지금이 타이밍이다. 전국 각지에서 청보리가 푸릇함을 뽐내는 계절, 청보리 하나만으로도 매년 4월 항공·선박 모두 ‘티케팅 전쟁’을 하게 만든다는 ‘섬 속의 섬’ 가파도로 갔다.
◇모슬포 운진항에서 배로 10분
지난 13일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 운진항여객터미널은 이른 아침부터 가파도에 가려는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미처 예매를 하지 못한 이들을 위해 운영하는 현장발권 창구에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제주에 올 때마다 날씨 운이 안 좋아 가파도 가는 배에 올라보지도 못했다”는 임정선(56·인천 연수구)씨는 “오늘은 여행객들이 몰려 ‘또 못 가나’ 싶었는데, 잠 설쳐가며 서두른 덕분에 가파도행 (여객선) 티켓을 끊었다”며 표를 흔들어 보였다. 터미널 주차장으로는 관광버스와 나들이 차들이 쉴 새 없이 밀려 들어왔다. 마라도가파도정기여객선을 운항하는 ‘아름다운 섬나라’ 황영호 마케팅팀장은 “4월부터 5월 초까지 ‘청보리 시즌’의 경우 하루 15회, 30분 간격으로 여객선을 증편 운항하고 있지만 현장 발권마저 조기 마감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날씨가 좋은 날엔 주중·주말 할 것 없이 하루 평균 4000명 정도가 여객선을 이용해 가파도에 들어간다”고 했다.
운진항에서 여객선에 오른 지 10여 분이면 가파도 선착장에 닿는다.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섬에 발을 내디디자 따사로운 봄볕과 청량한 바닷바람에 기분 좋은 현기증이 일었다. 눈높이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바다와 수평을 이룬 듯 굴곡 없는 섬에선 초록빛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섬 50만㎡ 물들인 초록빛 바다
섬의 초입 갈림길에서 청보리밭부터 만나고 싶다면 동쪽인 왼쪽 길로 향한다. ‘청보리밭’ 이정표가 있는 야트막한 경사의 좁다란 길로 들어서면 별안간 드넓은 ‘초록빛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제주의 푸른 바다와 색의 대비를 이루며 바람결 따라 일렁이는 보리들의 군무(群舞)는 뭍에서 찾아온 수고를 잊기에 충분하다. 제주 바닷가 근처에서 흔히 목격되는 보랏빛 야생화 갯무꽃까지 더해져 천상의 화원이 따로 없다. 따스한 봄볕과 바닷바람이 키워낸 보리밭 앞에선 세대 불문 무장해제된 표정으로 사진 찍느라 바쁘다.
청보리밭 샛길을 걷다가 제주 섬쪽을 바라보면 가까이 청보리밭과 밭담(돌담), 제주 바다 그리고 형제섬과 송악산, 산방산, 한라산까지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제주섬의 총 7개 산(산방산, 송악산, 고근산, 단산, 군산, 한라산, 영주산) 중에서 표선면 영주산을 제외한 6개의 산을 가파도에서 모두 볼 수 있다”는 게 황 팀장의 말이다.
최백호의 노래 ‘가파도’ 속 가사처럼 “청보리밭에 누워~” 볼 수는 없지만, 누구나 두 팔 벌려 바람과 포옹하기 좋은 곳. 유난히 풍성해 보이는 가파도 보리밭은 녹색을 띈다 해서 ‘녹보리’라고도 불리는 청보리(강호청)가 75%, 찰보리(노란보리)가 15% 비율로 섞여 있다. 가을에 씨만 뿌려놓으면 잘 자라 싹을 틔우는 보리는 이 섬에서 밭을 놀리기에 좋은 효자 농작물이었다. 한때 재배 면적이 82만여㎡(약 25만평)에 달했으나 현재 49만여㎡(약 15만평) 수준으로 줄었다. 가파도는 김동옥 전 이장을 포함해 3명의 농부가 보리 농사를 도맡고 있다. 진영환(70) 가파리장은 “4월부터 5월 초까지 한 달 넘게 하던 청보리축제도 올해는 마을 인력 부족 등으로 8일부터 16일까지 단축해 조용히 열었지만 청보리만큼은 꺾인 곳 하나 없이 풍작”이라며 “5월 중순쯤 지나면 수확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소망전망대 오르고 벽화 골목 거닐고
가파도는 섬 최고 높이가 해발 20.5m로 ‘키 작은 섬’이라 불린다. 전체 면적도 0.9㎢ 남짓이라 해안 둘레길을 따라 걸으며 한 바퀴 둘러보는 데 2시간이면 충분하다. 가장 높은 곳은 ‘소망전망대’다. 그래 봐야 해발 23m쯤 되지만, 전망이 끝내준다. 계단 몇 개 올랐을 뿐인데 풍력발전기 말고는 시야를 가로막는 높은 건물이 없어 사방이 초록이요, 푸른 바다다. 가까이 가파도 들녘부터 선착장 부근 나지막하게 지붕을 맞댄 섬마을 옛집들, 국토 최남단 섬 마라도, 송악산과 산방산, 멀게는 한라산까지 방향에 따라 가파도 일대가 병풍을 두른 듯 펼쳐진다.
이어지는 섬 마을 산책은 소박함을 찾아가는 여정과도 같다. 가파초등학교를 지날 땐 이따금 운동장 한쪽에서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등교를 하는 평일에만 허락되는 ‘백색소음’이다. 전교생이 9명, 유치원생 2명인 가파초등학교는 최남단 공립초등학교(마라분교장 제외)다. 바로 옆 ‘회을공원’은 가파도 출신으로 1922년 가파초의 전신인 ‘신유의숙’ 설립을 추진했던 독립운동가 회을 김성숙 선생의 호를 딴 곳이다. 공원을 지나 하동포구 방향으로 직진하면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들과 벽화 골목이 나온다. 주민이 2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섬마을엔 흔한 마을해설사나 문화관광해설사 한 명 없지만 가파도의 두 우물 이야기, 거센 파도로부터 가파도를 지켜주고 있다는 수중 암초와 고인돌이 섬 서쪽에 밀집된 이유 등이 적힌 벽화가 있다.
길의 끄트머리 하동포구 근처엔 ‘무인카페 등대’와 함께 ‘가파리어촌계 회관’ 그리고 ‘가파도사진관’이 자리한다. 가파도사진관은 게임 CG 디자이너로 일하다 2012년에 가파도로 이주한 사진가 유용예 씨가 제주의 옛집을 고쳐 스튜디오로 꾸민 곳인데, 주인이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다. 바닷속 수중 촬영을 시작했다가 해녀가 됐고, 바다와 해녀 사진을 찍으면서 3년째 가파리어촌계장까지 도맡고 있는 유씨는 “사진관보다 그 옆에 있는 어촌계 사무실을 지키는 일이 더 많다”며 웃었다. 사진관은 사전예약제로, ‘가파도 스토리지’라는 유씨의 전시 프로젝트에 동의한 이들에 한해 사진 촬영을 진행한다. 유씨의 가파도사진관 이야기는 벽화 골목 중간쯤 지나치기 쉬운 자리에 있는 마을 강당에서도 만날 수 있다. 작년 하반기, 예술 프로젝트 ‘사진교실’을 진행한 유씨와 함께 당시 가파초등학교 졸업 예정자를 포함한 학생들이 찍은 가파도 사진 전시 ‘안녕, 푸른 바람의 섬’을 5월 말까지 연다. “사진을 통한 가파도 어린이들의 가파도 관찰 일기”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동심으로 돌아간 듯 마음이 맑아진다.
◇제주의 섬 그리고 제주어를 알아가는 시간
일부 여행객들 사이에선 “섬이 작아 볼 게 별로 없다”는 볼멘소리도 들리지만, 가파도에는 제주다운 풍경과 문화를 오롯이 간직한 흔적이 많다. ‘할망당’은 가파리 주민들을 수호하는 ‘해신당’. 1년에 한 번씩 집안과 객지로 나간 가족들의 무사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당이다. 마을의 한 주민은 “해녀나 어부가 아니어도 기도를 목적으로 일부러 찾는 이들도 많다”고 했다. 상동 우물도 볼거리다. 150여 년 전에 마을 주민들이 직접 우물을 파서 식수원 및 빨래터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이 우물 덕에 가파도는 제주도 유인도 중 유일하게 물 걱정 없는 마을이 될 수 있었다.
길을 거닐다 마주치는 제주어 간판이나 푯말도 지나치면 아쉽다. 돌담 위에 아기자기한 글씨로 써놓은 ‘가파도마씸~ 빙삭이 웃으멍(가파도입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문구를 따라 하며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꼬닥꼬닥 걸으멍(끄덕끄덕거리며 느릿느릿 걸으며)’ 간판이 보인다. 그렇게 ‘꼬닥꼬닥’ 걸어 직진하면 다시 섬의 초입 가파도 선착장이다.
가파도는 난도 ‘하’에 속하는 ‘올레길 10-1′ 코스(4.2km·2시간 소요)를 품고 있어 제주 올레길에 도전하는 이들이 부담 없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코스는 북서쪽과 남동쪽 해안둘레길 일부와 청보리밭과 마을 길을 거친다. 가파도 초입, 가파도마을회의 노인들이 “매년 당번을 정해 운영한다”는 자전거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려 탈 경우(시간 제한 없이 1인용 5000원, 2인용 1만원) 30~40분이면 해안둘레길을 완주할 수 있다.
◇가파도 ‘체크 아웃’
가파도행 여객선(해상공원 입장료 1000원 포함 성인 왕복 1만4100원, 신분증 지참)은 선박에 따라 290명·250명 정원제로 운항하기에 입·출도 시 왕복 항차(항해 차례)가 지정돼 있다. 섬 숙박객을 제외하고 당일 방문객의 경우 섬 체류 시간은 2~3시간. 매표할 때 입·출도 시간을 정하고 해당 시간에 승선하는 게 원칙이나 배를 놓쳤을 경우 다음 항차 발권이 끝나고 남은 좌석이 있을 경우에만 무료 연장 가능하다. 마지막 가파도 선착장 출발 시각은 오후 5시. 해가 서서히 눕는 아름다운 시간에 섬에서 발걸음을 돌리기 아쉽다면 가파도에서 하루쯤 묵어도 괜찮다. 유용예씨는 “마지막 배가 가파도 선착장을 떠나는 순간부터가 진짜 가파도의 시간”이라며 “섬에 홀로 남은 것만 같은 묘한 기분과 함께 비로소 나만의 섬이 된 듯 특별한 고요를 맛볼 수 있다”고 했다.
◇마라도·군산오름 등 주변 여행도
당일 여행객은 섬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이 한정돼 있으니 반나절 정도 이어 가볼 만한 주변 여행지에 눈이 가기 마련. 선택지는 다양하다. 모슬포 일대는 알뜨르비행장과 벙커, 모슬봉 일제 군사시설 등 어두운 역사의 흔적을 찾아가보는 ‘다크투어’ 코스로 유명하다. 봄을 만끽하며 걷기 여행을 이어가고 싶다면 가파도에서 보이는 ‘송악산 둘레길’에 오르거나 운진항여객터미널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산방산’ ‘사계해안’ 해변길을 걸어보는 것도 즐겁다.
가파도에서 일몰을 보지 못해 아쉽다면 가파도와 가까운 오름인 안덕면 ‘군산오름’에 올라보라. 정상부 가까이까지 차로 진입이 가능하다. 다만 일출·일몰 무렵에 찾는 이들이 몰리는 데다 마을길을 낀 일차로라 초행자는 운전에 유의해야 한다. 걸어 올라갈 경우 30여 분 걸린다. 군산오름 정상에 서면 한라산, 중문관광단지, 산방산, 마라도뿐 아니라 송악산 가까이 자그마한 형제섬도 발 아래 있다. 운진항에서 차로 20여 분 거리엔 46만㎡(14만평) 규모 오설록농장 ‘서광차밭(서광다원)’이 반긴다. 차나무를 배경으로 멋진 사진을 담아가거나 길을 낸 일부 구간을 걸어볼 수 있다.
추사체를 완성하고 국보 ‘세한도’를 탄생시킨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도 지나치면 아쉽다. 운진항여객터미널에서 불과 차로 10분 거리다. 수선화를 사랑한 추사의 이야기와 초의선사와의 우정을 엿볼 수 있는 유배지, 그의 생애를 기념한 ‘추사관’이 나란히 있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국토 남단의 섬, 가파도와 마라도를 하루 코스로 다녀오는 것도 가능하다. 여객선 운항사인 아름다운 섬나라에 따르면 하루에 두 섬 모두 다녀가는 이들이 평균 30명쯤 된다.
[ 청보리호떡·청보리김밥·청보리아이스크림... ‘청보리 코스 간식’ 맛볼까? ]
가파도 ‘주전부리 먹방’ 코스
‘청보리 시즌’엔 가파도 주전부리들도 푸릇푸릇하다. 청보리밭 샛길을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전망대 카페’에선 청보리호떡(2000원)을 입에 문 이가 많다. 청보리밭을 내다보며 먹는 호떡과 청보리 아이스크림(5000원)은 전망 덕분인지 꿀맛이다. ‘전망 값’ 하는 청보리 아이스크림 맛집이 또 있다. 섬 초입에 있는 ‘블랑로쉐’에서는 바다와 섬이 두루 보인다. 정갈하게 담아낸 아이스크림을 들고 ‘가파도 인증 샷’을 찍는 젊은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상동포구 부근 마을 진입로에 있는 ‘꼬닥꼬닥 걸으멍’에선 청보리 김밥(6000원)을 판다. 야외 파라솔 아래에서 먹어도 되지만, 한 줄 포장해 자전거 타고 해변가 벤치에 앉아 먹으면 피크닉 기분 내기에 그만이다. 가파도 보리쌀을 섞어 만든 김밥은 씹을수록 구수하다. 제주어로 ‘돌코롬개역(달콤한 미숫가루)’이라는 청보리 미숫가루나 새싹보리 잎을 우린 청보리 순차를 곁들이면 맛있다. 제주어로 적은 메뉴판을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먹기 좋게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멘도롱 커피’로, 조금 차거나 선선한 아메리카노는 ‘산도록 커피’로, 고소한 커피 즉 카페라테는 ‘코소롱 커피’라 적어두었다. 이 밖에 청보리 핫도그, 청보리 맥주, 청보리 떡 등 ‘청보리’ 빠지면 섭섭한 주전부리들이 길을 따라 이어져 코스로 즐길 수 있다.
가파도 섬 스타일 밥상은 이 구역의 노포 ‘용궁식당’이 유명하다. 해녀 2대가 식당을 직접 운영한다. 용궁정식(1인 1만7000원)을 주문하면 바삭하게 구워낸 옥돔구이를 비롯해 제주 해산물을 활용한 집 반찬을 골고루 맛볼 수 있다. 여기에 뿔소라나 보말을 넣은 부침개를 추가로 주문해 먹는 이가 많다. 한 오랜 단골은 “용궁정식 밥값이 9000원이던 시절부터 다녔는데 어느덧 1만7000원”이라며 아쉬워하면서도 “맛만큼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용궁식당 부근에 있는 ‘가파도해물짜장짬뽕’은 해물짬뽕(1만5000원)을 찾는 이가 압도적으로 많다. 새싹보리와 시금치를 넣었다는 연두색면에 가파도 바다에서 나는 뿔소라, 돌게, 톳, 돌미역 등이 들어간다. 한 그릇 제주바다를 먹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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