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시각] 투명 인간이 된 어느 총영사

김은중 기자 2023. 4. 22. 03:04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가 2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2023년도 재외공관장 초청 만찬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지난달 말 서울에서 대사·총영사 등 166명이 참석한 가운데 윤석열 정부 첫 재외공관장 회의가 열렸다. 코로나 이후 4년 만에 대면으로 진행돼 직원들이 반가운 얼굴들과 재회할 수 있는 자리였고, 회의 참석을 위해 귀국한 주미·주러 대사가 각각 국가안보실장과 외교부 1차관에 임명돼 주재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무엇보다 대사를 대사라고, 총영사를 총영사라고 호명(呼名)하지 못했으니 사연은 이렇다.

통상 외교부는 분기마다 재외공관장 인사를 한다. 임명 통보를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대사가 되는 건 아니다. 빈 협약에 따라 주재국의 부임 동의를 받는 절차, 이른바 ‘아그레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달 부임한 조현동 주미 대사는 아그레망을 받기까지 1주일이 걸리지 않았지만, 문재인 정부 때 이수혁 대사는 60일이 넘게 걸렸을 정도로 사람과 상황에 따라 기간은 천차만별. 그래서 외교부는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대통령이 신임장을 수여하기 전까지 언론에 엠바고(보도 유예)를 요청해왔다. “국익을 생각해 협조해달라”는 거다.

그런데 이번 정부 들어 아그레망이 필요 없는 나라의 총영사직까지 엠바고를 요구하고 나섰다. 외교부는 오랜 관행을 뒤집은 이유로 “유관 기관의 강력한 요청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 인사를 언론이 취재해 사전 검증할 기회를 원천 박탈하는 것이란 지적이 나왔다. 과거 김경수 전 경남지사가 ‘드루킹’에게 댓글 조작 대가로 센다이 총영사직을 제안한 것처럼, 상대적으로 책임의 무게가 가벼운 총영사직은 정권의 보은(報恩) 인사에 종종 활용된 전력이 있다. 지금 여당은 전 정부 시절 기회가 될 때마다 “‘캠코더(대선 캠프, 코드, 더불어민주당) 공관장이 외교 역량을 저해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기자들은 올해 춘계 공관장 인사에 대한 엠바고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올해 공관장 회의에 현직이 아닌 내정자 다수가 참석하면서 촌극이 벌어졌다. 외교부가 회의 면면을 홍보하며 배포한 자료, 언론이 취재해 보도한 사진 속에서 얼굴·이름·직함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엠바고도 없고 사진까지 다 나왔는데 임명 사실을 보도해도 되는 것 아니냐”고 물으면 당사자나 외교부 직원들이 “쓰지 말아달라” “용산에서 뭐라 한다”라고 읍소하는 코미디가 회의 기간 내내 반복됐다.

외교부 관계자는 ‘전임 정부와 달리 총영사직에 대한 엠바고를 설정한 것이 비정상의 정상화냐’는 질문에 “해석하기 나름”이라며 말을 아꼈다. 기자가 취재해 입수한 총영사 인사 명단을 보니 전문성을 갖고 있어 고개를 끄덕일만한 사람이 다수였다. 하지만 정부가 비정상을 고수할수록 ‘낙하산 인사를 부담 없이 내리꽂으려는 포석 아니냐’는 의구심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