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원짜리 커피 사자 불호령… “미치셨어요? 물이나 마시세요”
#1. A: “모닝커피 -1500원” B: “모닝커피 말고 모닝워터 하세요.” A: “카페인이 없으면 출근을 못 해요. ㅜㅜ” B: “한 번 드시지 말아보세요. 출근하는지 못 하는지. 커피는 사치예요!”
#2. A: “편지지+볼펜 3자루 -7200원” B: “제정신 아니시네요.” C: “집에 있는 공책 뜯어서 사용하세요.”
‘거지방’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들어본 적이 있고, 실제 참여도 해봤다면 당신은 MZ세대일 가능성이 크다. 카카오톡 오픈채팅(익명의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는 채팅 서비스)에서 ‘거지방’을 검색하면 수백 개의 단체 채팅방이 뜬다. ‘돈을 버는데 돈이 없는 직장인 거지방’ ‘한 달에 30만원만 쓰는 거지방’ ‘시험 기간에도 커피를 허용하지 않는 대학생 거지방’ 등 다양한데, 모두 이달 들어 생겨났다.
‘소비방’ ‘절약방’으로도 불리는 거지방에서는 자신의 지출 내역을 공개하고 다른 이들의 평가와 조언을 받곤 한다. 거지방에서 나온 재미있는 대화는 밈(meme)이 돼 인터넷 커뮤니티, 소셜미디어 등으로 퍼지고 있다. 500원짜리 생수를 샀다고 하는 사람에게 “오후에 비 온다는데 좀 더 기다리시지 그러셨어요”라고 하거나, 버블티를 사 마셨다는 사람에게 “다음부터는 컵에다 버블 모양의 스티커를 붙여라”고 하는 식이다.
대부분의 거지방은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한 분위기다. 불필요한 지출을 고백하면 불호령이 떨어진다. “여자 친구와 마라탕 4만원어치 시켰는데 다 못 먹었고 남긴 건 버렸다”고 하자, “둘이 2만원어치 먹어도 남던데, 무슨 일이냐” “남은 것 버리지 말고 다음 날 밥 말아 먹으면 된다” “연애는 사치다. 헤어져라” 같은 반응이 쏟아졌다. 회사 스트레스로 단 게 당겨 3900원짜리 과자를 샀다는 직장인에게는 “회사 탕비실을 털어야지 뭐 하는 짓이냐” “스트레스받을 땐 산책을 해라” “과자 말고 200원짜리 사탕을 사먹어라” 등의 조언이 나왔다.
가장 많은 비난은 프랜차이즈 카페 커피와 담배 소비, 택시비에 쏟아진다. 5000원짜리 아이스 카페라테를 사먹었다는 대학생은 “미쳤다” “물이나 마셔라” “카페라테는 생일에나 마시는 것” 같은 비난이 쏟아졌다. 담배를 사느라 4500원을 쓴 직장인에게는 “돈 써서 왜 건강을 망치느냐” “흡연 부스에 가서 간접 흡연을 하라” 등의 반응이 나왔다. 택시는 금기시돼 있다. 대중교통 혹은 도보로 이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 사진을 올리거나 유료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것도 꾸지람을 듣기 일쑤다. 소비를 조장한다는 이유에서다.
사고 싶은 것을 올리고 허락을 구하기도 하는데, 대부분 반려된다. 무선 이어폰 한 쪽을 잃어버려 한 쪽을 당근마켓(중고거래 플랫폼)으로 사도 되냐는 질문엔 “이제부터 귀가 하나 없다고 생각하라” “남은 한 쪽을 팔아라”라는 답이, 남자 친구와 사귄 지 1000일인데 선물로 어떤 게 좋으냐는 질문엔 “사랑이 듬뿍 담긴 손 편지” “1년 넘어가면 100일 단위 챙기지 말라”는 답이 나왔다. 고해성사도 종종 보인다. 대부분 과소비를 했으니 반성한다는 내용이다. 1500원짜리 모닝 커피를 사 마신 직장인은 “오후에는 회사 탕비실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타 먹겠다”고 했고, 한 취업 준비생은 지난 주말 친구와 여행을 갔다가 흥청망청 돈을 썼다며 이번 주에는 외출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칭찬이 나올 때도 있다. 돈을 쓸 뻔했는데 쓰지 않거나, 세일하는 상품을 싸게 사는 경우다. 다니던 헬스장을 끊고 공원에서 운동을 시작했다는 직장인과 스터디 카페 대신 집에서 공부하기로 했다는 고등학생은 “잘하셨어요” “굿” 등 칭찬 세례를 받았다. 한 거지방은 ‘거지의 덕목’이라는 제목의 공지 사항을 띄웠다. “첫째 덕목은 빌붙기, 둘째 덕목은 뽕뽑기다.” 절약 팁도 공유된다. ‘앱으로 광고 보고 30원’ ‘1만보 걷고 100원’ 등 앱테크(애플리케이션+재테크)는 기본이고, 저렴하고 질 좋은 물건을 파는 곳과 금리가 좋은 예·적금 상품 등의 정보 공유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재미있으면서도 매서운 채찍질뿐만 아니라, 따뜻한 공감과 위로도 거지방의 매력이다. 거지방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얘기 중 하나는 “요즘 물가가 너무 올랐다”는 것. 한 직장인이 “곧 점심 시간인데 두렵다. 물가가 무서울 지경”이라고 하자 “나도 요새 점심 값이 부담돼 도시락을 싼다” “근처 공공기관 구내식당을 이용하고 있다” 같은 말들이 더해졌다. 한 대학생이 아침 식사에 1600원, 점심에 3800원을 썼다고 하자, 사람들은 “건강 버린다. 잘 챙겨 먹어라” “집에서 밥 하고 반찬 가게에서 2만원어치 사면 일주일 먹는다”는 말을 건넸다.
30명이 참여하는 거지방을 운영 중인 대학생 김모(23)씨는 “돈을 좀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지방을) 개설하게 됐는데,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다 보니 절약 효과가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직장인 거지방’에서 활동 중인 회사원 강모(28)씨는 “(과소비를 해서) 혼이 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고 유쾌하다”며 “나랑 비슷한 처지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과 대화 나누는 게 즐겁다. (거지방이) 생활의 활력소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거지방’이 등장한 배경으로 경제 불황과 MZ세대의 특성을 지목했다. 이수진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특히 Z세대의 경우 박탈감을 느꼈을 때 이를 유희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성과 이른바 ‘갓생(God+生, 계획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추구하는 성향을 갖고 있는데, 이런 특징들이 불황과 맞물려 거지방이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어 “박탈감, 위기감 등을 타인과 소통하며 해소할 수 있는 점은 긍정적이나, 구조적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과는 동떨어져 있다”고 평가했다.
이은희 인하대 교수(소비자학)는 “물가는 올랐고, 젊은 세대가 투자했던 주식·코인 등의 가치는 뚝뚝 떨어졌다.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거지방은 소셜미디어 소통이 일상화된 MZ세대가 ‘자조’라는 방식으로 놀이처럼 절약을 즐기는 현상”이라고 했다. 이어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는 모습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서도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익명 채팅방인 만큼, 사기 등은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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