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도 불안했던 이 남자, 바게트를 한 보따리 샀다
마이클 클레이튼
불안은 온갖 양태로 피어난다. 남자에게는 한쪽 옆구리를 가득 채운 바게트 한 보따리로 피어났다. 바게트가 하나, 둘, 셋… 셀 수 있다, 하지만 세지 않는다. 그저 ‘많음’이 남자의 불안을 더 잘 드러내준다. 그렇게 빵 보따리를 옆구리에 끼고 골목으로 접어드는 그를 또 다른 남자가 허겁지겁 달려와 멈춰 세운다. 아서! 아서! 기다려! 남자는 멋쩍은 듯 배시시 웃으며 발걸음을 늦춘다. 대체 무슨 사연인 걸까?
영화 ‘마이클 클레이튼’(2007)에서 바게트 한 보따리를 끼고 가는 남자의 이름은 아서(톰 윌킨슨), 그를 불러 세운 남자의 이름은 마이클, 마이클 클레이튼(조지 클루니)이다. 마이클은 대형 법무법인의 ‘해결사’다. 눈에 드러나는 혹은 공식적인 업무를 보지 않고, 변호사로서 법 전문 지식을 활용해 법인의 각종 뒤치다꺼리를 비공식적으로 도맡아 해결한다. 이를테면 뺑소니를 친 고위 고객의 뒷수습을 드러나지 않게 해주는 식이다. 어느 늦은 밤 또 한 건의 궂은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 그는 돌연 차를 멈춰 세운다. 뜬금없게도 언덕에 매여 있는 말 세 마리가 주의를 끈 것이다. 차에서 내려 말을 보고 있는데 차가 갑자기 폭발하고 그는 덕분에 목숨을 건진다. 그리고 영화 속 시계는 나흘 전으로 돌아간다.
바게트의 남자 아서는 법인의 변호사로, 농약 회사 ‘유 노스’의 변호를 맡아 지난 몇 년 동안 3만시간을 쏟아부었다. 유능한 베테랑 변호사인 그이지만 오랜 송무가 조금씩 정신을 갉아먹는다. 과로로 인한 조울증도 만만치 않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송사의 원인이 된 유 노스의 제초제가 실제로 원고인 농부들을 죽인 발암 물질이라는 내부 문건을 발견한 것이다. 말하자면 명분 없이 자본만으로 몰아붙이는 송사를 끌면서 그는 정신줄을 놓아 버리고 원고 신문을 하다가 옷을 벗고 난동을 부린다. 바로 이런 아서의 뒷수습을 하러 마이클 클레이튼이 나서지만 해결은 간단치 않다. 머리가 비상한 아서는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 도망쳐 버리고, 그를 진짜로 ‘해결’해 버리고자 유 노스에서는 암살자를 동원한다.
하, 저 많은 바게트를 어떻게 처리할까? 영화 속에서 극도의 불안감을 표출하는 바게트 한 보따리를 보고 나도 덩달아 불안해져 버렸다. 프랑스, 나아가 빵 자체의 대명사라 여기는 바게트는 사실 모양에서 따온 이름이다. 밀가루, 효모, 소금, 물로 만든 기본 반죽을 빚는 모양에 따라 바게트, 불르(반구), 에피(벼 이삭) 등의 이름을 붙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이 기본 빵들은 신선함을 아주 빨리 잃는다. 구워낸 지 반나절이면 생기가 확 가시고 딱딱해져 먹기도 불편해진다. 그런 빵을 한 보따리나 사다니! 매일 한 덩이씩 사라고 그 많은 빵집이 존재하는 것인데 대체 아서는 얼마나 불안했던 것일까?
불안하다고 빵을 한 보따리씩 충동구매하면 안 되지만 사 버리고야 말았다면 어떻게 관리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아서는 유 노스의 해결사들에게 자살로 위장된 독살을 당해 빵에 손도 제대로 못 대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냉동 보관을 권했을 것이다. 빵이 아직 생기를 품고 있을 때 수평으로 반을 가르고 수직으로 이삼 등분해 썬다. 지퍼백에 담아 냉동실에 두었다가 먹을 만큼만 꺼내 토스터에 구우면 따끈하고 바삭해진다. 오븐에서 갓 구워낸 것만큼이야 못하겠지만 냉동실에 묵혀 둔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만큼은 맛있을 것이다.
아서는 독살당하고 마이클은 뜬금없는 말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아서가 만약을 대비해 복사해 남겨 놓고 간 내부 문건 덕분에 마이클은 유 노스의 흉계를 파악한다. 이를 근거로 경찰인 친형과 손을 잡고 감청 장치를 몸에 설치한 뒤 원고인 농부들과 합의하려는 유 노스의 본사에서 위장 협상을 진행한다. 자신의 법무법인까지 연루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고 털어놓자 유 노스는 마이클을 매수하려 들지만, 그 자체가 범죄 사실의 인정이므로 결국 모든 악행이 들통나고 만다. 음지의 해결사 마이클 클레이튼은 그렇게 양지의 해결사로 거듭나 죽은 아서의 원한까지 덜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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