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볼 마시고, J팝 떼창하고, 여행도 일본으로…
Z세대 중심 J웨이브 2.0
“하나, 둘, 셋, 넷.”
“도오데모 이이요오나 요루다케도.”
일본 가수가 한국어로 숫자를 외치자, 한국 팬들이 일본어로 따라 부른다. 지난 13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있는 공연장 무신사 개러지에서 열린 이마세(23) 첫 쇼케이스 현장이다. 그는 지난해 발표한 곡 ‘나이트 댄서’로 일본 가수 최초로 국내 멜론 종합 차트 17위에 올랐다. 이날 그의 첫 내한 쇼케이스를 보러 한국 팬 500여 명이 모였다.
서울 한복판에서 일본 노래 떼창이 등장한 건 2019년 노재팬(일본 상품 불매) 운동 이후 처음이다. 이 공연장에서 걸어서 불과 7분 떨어진 곳에 노재팬으로 철수하고 이름을 ‘마루가메 제면’에서 ‘홍대제면소’로 바꾼 우동집이 있다. 일본 맥주만 마셔도 손가락질받던 시절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리에서 일본 노래가 흘러나오고, 일본 애니메이션이 국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가장 인기 있는 술은 일본 위스키 산토리가 들어간 하이볼, 예약이 가장 힘든 음식은 스시다.
여자들은 히메컷(층 낸 생머리), 남자들은 전성기 기무라 다쿠야처럼 입고, 유튜브로 다나카상과 마츠다 부장의 콘텐츠를 보며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다. 또 외래 관광객 통계를 보면 일본인이 한국에 가장 많이 들어오고 있다. 봄바람처럼 불기 시작한 ‘J 웨이브(J-Wave) 2.0′이다.
진화한 J팝
대중문화 바람은 음악에서 시작된다. 오감 중 귀가 가장 원초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 J팝 인기는 틱톡을 타고 흘러왔다. 젊은 세대들은 틱톡으로 음악을 접하고, 유튜브로 찾아 듣는다. 이마세, 아이묭, 유우리, 요네즈 겐지 등의 노래가 ‘인싸(인사이더)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라며 플레이리스트에 오른다.
과거에도 J웨이브가 분 적이 있었다.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중반. 당시 젊은 세대는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일본어를 익혔고, 어둠의 경로로 엑스재팬 CD를 구해 들었다. 정부가 일본 대중문화 수입을 허용하자 일본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남자는 기무라 다쿠야, 여자는 아무로 나미에 패션을 따라하던 때다. 그러나 J팝이 자니스 사무소의 쇠락을 시작으로 저물어가는 동안 K팝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J팝이 시작한 기획사 중심의 아이돌 팬덤 문화가 K팝으로 발전해 유튜브를 기반으로 전 세계로 확산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J팝은 당시와 다르다. 현재 J팝 시장은 팬덤에서 노래로, 아이돌에서 싱어송라이터로 재편 중이다. 한국에서 인기 있는 J팝도 대부분이 싱어송라이터다.
과거 J팝 가수들이 해외 진출을 꺼리고, 소셜미디어를 즐겨 하지 않아 ‘갈라파고스(태평양의 고립된 화산섬)’라 불렸다면, 지금은 정반대다. 이들은 틱톡과 유튜브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해외 진출을 희망한다. 일본 영자지 재팬 타임스는 “과거 일본 뮤지션들은 국내에서의 성공과 해외 시장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고, 국내 매출이 떨어질 때만 후자를 택했다”며 “그러나 지금은 스트리밍과 세계화된 음악 산업으로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고 보도했다.
이렇게 흐름을 바꿔놓은 대표적인 가수가 요네즈 겐시(32)다. 그는 일명 보컬로이드 프로듀서 출신이다. 보컬로이드란, 야마하에서 2004년 출시한 보컬 합성 프로그램이다. 멜로디를 짜고 그 위에 글자를 쓰면 인공 보컬이 그대로 노래를 부른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빌보드 재팬 보컬로이드 차트가 새로 생길 만큼 시장이 크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는 니코니코 동화(이하 니코동)라는 동영상 플랫폼이 탄생한다. 이때부터 일본 아마추어 프로듀서들은 보컬로이드로 곡을 만들고 니코동에 곡을 발표하며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걸 보고 일본 아마추어 보컬리스트들은 니코동에서 좋아하는 보컬로이드의 곡을 선택해 커버한 후(따라 부르기) 다시 니코동에 올린다. 이들을 ‘우타이테’라 부른다.
이때부터 니코동은 실력 있는 프로듀서와 보컬리스트들의 경합장이 됐다. 여기서 눈에 띄는 이들이 기획사와 계약하는 시스템이 된 것이다. 니코동의 쇠락과 함께 무대는 유튜브와 틱톡으로 옮겨졌다. 황선업 음악평론가는 “일본 음악계가 기획사 아이돌 중심에서 싱어송라이터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직접 곡을 만들고 유통시킬 수 있는 실력 있는 가수들이 많이 나왔다”며 “이마세도 스무 살에 직접 곡을 만들어 이듬해 틱톡에 올리면서 유명해졌고, 이후 유니버설 뮤직과 계약하며 활동 반경을 넓혔다”고 했다.
틈새를 공략한 J무비
J팝의 또 다른 변화는 애니메이션과의 결합이다. 젊은 J팝 가수들은 해외 진출 수단으로 애니메이션 OST를 자처한다. 스포티파이 재팬 관계자는 “애니메이션은 일본 음악을 전 세계에 홍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말했다. 가수 아도는 지난해 애니메이션 ‘원피스 필름 레드’ 주제가를 부르며 애플뮤직 차트에 진입했다. 요네즈도 지난해 TV 애니메이션 삽입곡 ‘킥 백’으로 국내 유튜브 뮤직에서 한국 인기 음악 순위 5위를 차지했다. 최근 국내 영화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른 ‘스즈메의 문단속’의 OST도 유튜브 뮤직 13위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 애니메이션을 ‘J웨이브 2.0′으로 보긴 어렵다. 코로나 기간에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칼날 : 무한열차편’도 215만명을 불러 모으는 등 언제나 강했기 때문이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현재 국내 극장가 판도는 바뀐 트렌드를 따라잡지 못한 한국 영화의 부진 탓이 더 크다”고 말했다.
오히려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건 지난해 개봉해 100만 관객을 넘긴 실사 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와 넷플릭스 세계 순위 8위까지 올라간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다. ‘오세이사’는 영화 ‘주온’ 이후 21년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다. 역대 일본 실사 영화 중에는 1999년 개봉한 ‘러브레터’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원작 소설도 국내에서 40만부 이상 팔리며 교보문고에서 9주 연속 외국 소설 1위를 기록했다.
‘오세이사’의 주요 관객층은 10~20대 여성. ‘더 퍼스트 슬램덩크’ 등 애니메이션이 기존 팬덤인 30~40대 남성들을 중심으로 인기를 끈 것과 비교된다. 이들은 인스타그램으로 ‘오세이사’를 접했고, 영화관을 방문해 눈물을 흘렸으며, 소설을 굿즈처럼 사모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라는 반응이다.
지금의 30~40대가 ‘오세이사’를 본다면 클리셰 범벅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른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소녀와 불치병을 앓는 소년의 사랑 이야기라서다. 손예진 주연의 ‘내 머릿속의 지우개’, 박신양 주연의 ‘편지’도 생각난다. 그러나 국내 영화계에서 돈이 안 된다는 이유로 멜로 계보가 뚝 끊겼고, 이 빈틈을 일본 영화와 드라마가 치고 들어왔다. 넷플릭스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 역시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와 집안의 반대로 헤어진 남자가 첫사랑과 재회하는 이야기다. “오겡키데스카”를 외치던 영화 ‘러브레터’의 감성이다. 이 먹먹한 서정이 기성 세대에게는 익숙하지만, 젊은 세대에겐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분석이다.
이렇게 10~20대를 중심으로 일본 영화·드라마 마니아층이 생겨나자 OTT 회사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국내 OTT 웨이브는 지난달 화이트 데이를 맞아 ‘오세이사’를 단독 공개했다. 왓챠는 안도 사쿠라 주연의 일본 드라마 ‘브러쉬 업 라이프’, 기무라 다쿠야 주연의 ‘교장’을 단독 서비스한다.
문화에 국적 없는 Z세대
‘유행은 20년 주기’라는 말이 있다. 20년마다 유행이 반복된다는 뜻이다. 지금 불기 시작한 ‘J웨이브 2.0′도 그 주기로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패션이 대표적이다. 지금 가장 인기 있는 패션은 세기말로 불리는 ‘Y2K’인데, 당시 이를 이끌었던 것이 일본 대중문화였다. 최근 미국 코첼라 무대에 선 가수 로렌으로 대표되는 기무라 다쿠야의 전성기 패션, 뉴진스 민지와 혜린의 히메컷(층 낸 생머리) 등이다.
한국 요식업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도 일식이다. 유명한 스시, 야키토리(일본식 꼬치구이), 덴푸라 오마카세(일본식 튀김 맡김요리) 집들은 예약이 1년 치나 잡혀 있다. 하이볼의 인기로 일본 잡화점 돈키호테에서는 한국인 관광객이 일본 위스키 산토리를 쓸어 담는다고 한다. 일본 고급 위스키 히비키와 야마자키는 리셀(되파는) 시장까지 생겨났다. 노재팬 직격탄을 맞았던 일본 맥주 매출도 전년 대비 3배 가까이 증가하며 회복 중이다.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증가하면서 배우 심형탁, 가수 이지훈처럼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최근 데뷔하는 아이돌 그룹에는 대부분 일본인 멤버가 포함된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중국 멤버들이 문화 차이로 여러 번 실패하면서, 한국 문화도 이해하고 일본에서도 활동 가능한 일본 멤버가 필수가 됐다”고 말했다. 이런 일본 멤버들 영향으로 사진 찍을 때 포즈 브이를 거꾸로 한 ‘갸루 브이’가 유행하기도 했다.
현재 J웨이브 2.0을 이끄는 건 Z세대(1995년 출생 이후)다. 이들은 문화에 국적을 붙이지 않는다. 어색한 일본어를 구사하는 다나카상(개그맨 김경욱)도, 유창한 한국말로 일본 음식을 소개하는 마츠다 부장도 그저 재미있을 뿐이다. 이들의 영상을 보며 소개된 맛집과 문화를 좇아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다. 일본 관광청에 따르면, 올해 1분기(1~3월) 일본을 찾은 외국인 3명 가운데 1명이 한국인이었으며, 총지출액도 가장 컸다.
일본에서 한류가 유행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다. 일본 젊은 세대는 ‘한국 음악’이라서 K팝을 좋아한 것이 아니라, 유튜브로 음악을 듣다가 우연히 K팝을 좋아하게 됐다. 그러다 그 관심이 한국 패션, 음식, 드라마 등으로 퍼지며 ‘4차 한류’가 불었다. 현재 국내에 부는 J웨이브 2.0도 그 시작은 비슷하다. 미풍으로 그칠지, 태풍으로 세력을 키울지는 한국 대중문화의 역량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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