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은의 고전 노트]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 아테네를 망쳤다?
투표에 대한 고대 아테네인들의 사랑은 지극함을 넘어 망국적이었다. 사인 간의 논쟁이건 국정 운영이건 시비를 가리자 하면 투표 항아리부터 날아 왔고,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언도한 판결도 시민 중에 제비뽑기로 선출된 배심원단 투표로 이루어졌다. 심지어는 그 전까지 침략전을 해본 적 없던 아테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뛰어들 때도 참전 결정을 투표로 했다. 자연히 연설의 기술이 발달했고, ‘말발’이 무엇보다 중요한 정치력이었다.
흥미롭게도 아테네 시민은 효율성이나 실리가 아니라, 언제나 ‘아테네인의 명예와 긍지’에 더 열렬히 호소한 쪽을 선택했다. 아테네인들은 가슴이 웅장해지는 연설에 목숨도 재산도 아낌없이 내놓았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새’는 바로 이 ‘민주주의의 수호자’들을 조롱하는 정치풍자극이다. 아테네의 중우(衆愚)정치에 환멸을 느낀 두 인간이 새들의 나라로 가서 새의, 새에 의한, 새를 위한 새(new) 정치 실현을 약속한다. 이름부터가 ‘동료들의 연설가’라는 뜻인 페이세타이로스는 ‘희망의 아들’ 에우엘피데스를 바람잡이로 세우고 시민 새들의 자긍심을 일깨우는 연설로 절대 왕좌를 차지한다.
그리스 황금기(기원전 5세기)를 살았던 희극 시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보다 스물다섯 살쯤 어렸지만 동시대인이었다. 그런데 ‘새’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소크라테스를 아테네에 해악을 끼치는 선동가로, 신도 부모도 모르고 씻지도 않고 돌아다니는 패륜아들의 두목으로 지탄한다. 보수주의자였던 아리스토파네스에게는 당시로선 급진적이었던 ‘대화법’이 나라를 망치는 소피스트를 양산하는 주범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들 중 누가 더 옳았는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은 다른 영역의 일이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리스토파네스가 풍자의 대가인 것만은 틀림없다. 유머는 대상과 맥락에 크게 좌우되기에 보편적 농담, 유효기간 없는 풍자가 희소하다. 하지만 새들의 반란으로 굶주림에 허덕이게 된 신들을 대표해 협상에 나선 포세이돈이 수행원으로 따라온 야만족을 보고는 “신들이 이런 자를 공직에 선출하다니, 민주주의여”라고 한탄하더니, 결국은 또 다수결로 강화를 맺는 장면은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여전히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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