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세 박은선, 그녀의 발은 녹슬지 않았다
2003년 6월 8일 AFC(아시아축구연맹) 여자 선수권대회 홍콩전. 이날 위례정보산업고(현 동산고) 2학년 박은선이 남녀 축구 통틀어 역대 최연소 A매치 데뷔전을 가졌다. 그냥 구색 맞추기용도 아니다. 4골을 퍼부으며 8대0 대승을 이끌었다. 그녀는 조별 리그 4경기에서 7골을 넣었다. 2004년엔 아시아 여자청소년선수권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 득점왕(8골)까지 거머쥐었다.
‘국보급 스트라이커’ ‘여자 박주영’이란 칭호가 무색하지 않았다. 여자축구 레전드(전설)로 성장할 거라 의심치 않았던 그녀는 20년이 흐른 지금, 방황 끝에 돌아와 후배들을 이끌고 월드컵에 나서는 노장이 됐다. 이제 37세다. 7월 열리는 호주·뉴질랜드 여자 월드컵에서 선수 경력 첫 월드컵 골을 노린다.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와요. 넣는다면 월드컵 무대 첫 골인 걸요.” 그녀는 “앞서 두 번 월드컵에 나갔다. 그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골과는 인연이 없었다. 너무나도 넣고 싶다”고 말했다.
◇혜성처럼 등장, 그리고 방황
박은선은 180㎝ 넘는 키에 탄탄한 체격, 남다른 발재간을 지녀 일찌감치 초대형 재목으로 인정받았다. 너무 뛰어났기 때문일까. 견제와 질시가 심했다. 2005년 고교를 졸업하고 실업·대학 간 치열한 영입전 끝에 서울시청 유니폼을 입었다. 그런데 누군가 ‘고교 졸업 후 대학에서 2년간 뛰어야 한다’는 세부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의를 제기했고 3개 대회 출전 정지 처분을 받았다. 억울하다고 본 박은선은 울화가 치밀었다. 어린 혈기에 소속팀과 대표팀을 무단 이탈해 징계를 또 받기도 했다. 2010년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아예 축구화를 벗고 스포츠용품을 팔기도 했다. 박은선은 “그때의 시간들이 후회된다. 당시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조언을 해준다면 ‘그러지 마라. 버렸던 날들이 너무 아깝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2012년 서울시청으로 돌아와 정신을 가다듬고 이듬해 19골로 WK리그(여자 프로축구) 득점왕을 차지했다. 그런데 이번엔 야비한 논란이 벌어졌다. 너무 잘했던지 다른 팀 감독들이 성별 검사를 요구하고 나선 것. 국가인권위원회까지 나서 이런 주장을 한 감독들에 대해 성희롱을 한 것으로 보고 징계하라고 권고했지만 한국여자축구연맹은 경고만 했다. 이미 그녀가 깊은 수치심을 감수한 뒤였다.
◇월드컵 골 노리는 박은선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 불혹에 가까운 나이에 그녀는 국가대표로 복귀했다. 러시아에도 진출했다가 소속팀도 여러 번 바꾸고 2020년부터는 친정(서울시청)에서 뛰고 있다.
“저는 이제 축구를 즐길 수 있게 됐거든요. 해도 해도 어렵지만 그래도 제 인생의 전부고, 사람들이 제가 축구할 때 가장 즐거워 보인대요.”
2015년을 마지막으로 태극 마크를 달지 못하던 그녀를 작년 콜린 벨(62) 대표팀 감독이 불렀다. 벨 감독이 수년간 박은선을 지켜본 후 내린 결정이었다. 박은선은 이달 잠비아와 두 차례 평가전에서 3골을 넣으며 기대에 부응했다. 182㎝ 장신을 이용한 헤더 골에 몸싸움에서도 여전히 밀리지 않았다. 벨 감독은 “박은선을 온실 속 화초처럼 아끼다 월드컵에 데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온실 속 화초’ 발언은 처음이 아니다. 과거 미팅에서도 벨 감독이 똑같이 말했다고 한다. 박은선은 “처음에는 너무 웃겼다”면서 “그 말 안엔 ‘부상을 절대 당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다. 박은선은 2015년 캐나다 월드컵에서 발목 부상으로 조별리그 1, 2차전에 결장했다. 3차전, 16강전엔 출전했지만 온전치 않아 골 맛을 보지 못했다. 통산 월드컵 기록은 2회 출전, 5경기 0골. 박은선은 “이번 월드컵 명단에 포함되도록, 골을 넣도록 노력 많이 하고 있다”고 했다.
박은선은 대표팀에서 김정미(39·인천현대제철) 다음으로 고참이다. 하지만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스타일은 아니다. 오히려 후배들이 그녀의 적응을 도왔다. 7년 만에 돌아온 그가 어색해할 때 지소연(32·수원FC), 김혜리(33·인천현대제철) 등 선수들이 다가와 안부를 묻고, 함께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모두에게 너무 고맙다. 잠비아와의 1차전(7일)에서 9년 만에 대표팀 골을 넣었을 때 선수들이 내게 달려와 안기며 축하해줬는데,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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