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 통신장비, 미국산 둔갑해 10년간 아마존서 팔렸다
20일 오전(현지 시각)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 크리스털시티의 2층 건물에 들어서자, 건장한 체격의 수사관들이 가득한 사무실이 나왔다. 위조 상품 유통 같은 지식재산권 침해 범죄를 범정부 차원에서 공조 수사하기 위해 국토안보부 산하에 설치된 ‘국립지식재산권조정센터(IPR Center)’였다. 이 센터를 이끄는 제임스 맨쿠소 국장은 국토안보수사국 소속이지만, 관세국경보호청(CBP), 연방수사국(FBI), 국방범죄수사대(DCIS) 등 타 기관 소속 직원들도 많다.
에르메스 지갑과 스카프, 나이키 운동화, 카일리 화장품, 장난감 로즈 미니블록 등 다양한 물품이 놓인 테이블 앞에 선 마이크 볼 부국장은 “여기 있는 물건들 중에 ‘진짜’ 3개를 골라 보라”고 했다. ‘짝퉁’으로 보이는 허술한 상품도 있었지만 진위를 가리기 힘든 것도 많았다. 특히 애플 아이폰과 무선 헤드폰 같은 소형 전자제품은 패키징까지 완벽해 보였다. ‘진짜’를 골라내지 못하자 볼 부국장은 “여기 있는 것들 중 ‘진짜’는 없다. 온라인으로 상품을 주문했을 때 이런 것들을 받게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미국 정부가 IPR센터를 통해 ‘짝퉁 수사’를 조율하는 것은 일반 소비자 보호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맨쿠소 국장은 “우리가 하는 일의 큰 부분은 국가 안보 문제”라며 “미국 정부, 특히 국방부의 공급망 문제를 다루는 것이 여기서 하는 아주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말했다. 국방 조달 업체나 그 하청 업체들이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미국산 전자 부품이 아닌 중국산 가짜 부품을 납품해서 미 국방부의 핵심 시스템에 사용된 경우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볼 부국장은 “이런 가짜 부품들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네트워크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고, 제대로 작동하더라도 사이버 보안 문제가 있다”며 “국방부의 네트워크와 능력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IPR센터에는 공군 특별수사대, 육군 범죄수사사령부, 해군 범죄수사대 등 미군 수사 인력도 참여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미 당국은 중국과 홍콩에서 만들어진 라우터(인터넷 통신 연결 장치)와 트랜시버(휴대용 무선 통신기) 등의 부품에 미국 회사 ‘시스코’의 상표를 붙여 2013년부터 작년 4월까지 아마존과 이베이 등에서 판매한 미국 업체를 적발했다. 그런데 이런 부품 중 일부는 미국 정부와 미군 관련 기관에 납품됐다. 이미 지난 2011년 가짜 시스코 전자 부품이 미군에 납품됐다가 적발돼 미국 상원이 국방부 조달 시스템에서 가짜 물품을 걸러내는 절차를 만들도록 했는데, 10여 년 후 다시 비슷한 사례가 나온 것이다.
중국산 짝퉁이 미국 국방부 조달 시스템에까지 흘러드는 것은 조달 계약 업체가 1차, 2차, 3차까지 하청을 주는 관행 때문으로 알려졌다. 작년 9월 미 국방부는 방산 업체 록히드마틴이 만든 F-35 전투기의 납품을 잠시 중단시켰다. 록히드 마틴이 터보엔진 제조를 맡긴 업체 허니웰이 또 다른 업체로부터 구매한 자석에 중국산 합금이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조달 규정상 모든 소재와 부품이 미국산이어야 하기 때문에 이 자석을 모두 미국산으로 교체할 때까지 납품은 중단됐다.
작년 10월에는 2000만달러(약 265억원) 상당의 중국산 짝퉁 군복을 미국 내에서 생산한 것으로 속여 미 공군 등에 납품한 조달 업자가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다. 미 공군은 이 업자로부터 적의 야간 투시경을 피할 수 있는 적외선 반사 파카와 방염 처리가 된 방염 후드 등을 구매했는데, 미 공군이 테스트해 본 결과 이런 특수 기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해외 전장에 투입된 미군이 이런 가짜 군복을 진짜인 줄 알고 입고 있다가 적의 공격을 받아 전사할 수 있기 때문에 미 당국은 이런 사례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맨쿠소 국장은 “하청 업체들은 이윤을 위해서 이런 일들을 벌인다. 그렇기 때문에 납품받는 쪽에서 모든 하청 업체들까지 공급망 전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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