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건영의 경제읽기] 금융시장 악재는 호재가 될 수 있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 이후 은행 시스템 위기에 대한 경각심이 금융시장 전반에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경각심과는 달리 주식, 채권, 외환시장 등 글로벌 자산시장의 분위기는 다시금 뜨거워지고 있다. 미국 나스닥지수는 단기간에 저점 대비 20% 이상 급등했고, 유럽 주식시장은 미국의 긴축에 따른 충격이 다가오기 직전이었던 2021년의 고점에 육박해 있다. 코스피지수 역시 2500선을 상회하는 등 강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흐름은 외환·원자재시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국제유가는 서부텍사스유 기준으로 배럴당 80달러를 다시 넘어섰고,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원·달러 환율은 지난해 고점(달러당 1440원)에 비해 한참 낮은 1300원 수준에 머물러 있다. 주목할 것은 채권시장이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중장기적인 경기둔화를 반영하면서 미국의 10년 만기 장기 국채 금리는 큰 폭으로 하락해 3.4% 수준으로 되돌려졌다. 1일짜리 초단기 금리인 미국 기준금리가 4.75~5.0%인데 비해 10년 만기 장기 국채 금리는 3.4%를 기록하면서 장단기 금리가 역전된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금융시장에는 ‘Bad is Good(악재는 호재가 된다)’이라는 말이 있다. 좋지 않은 소식이 금융시장에는 좋다는 의미인데, 코로나19 팬데믹 당시만을 봐도 직관적으로 이해가 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인류 역사에 남을 악재로 기록된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기 위해 전 세계 정부와 중앙은행이 진행했던 경기 부양책은 주식·부동산 등 자산가격의 급등을 초래했다. 악재 자체가 자산시장에 좋다는 의미보다는 악재가 발생했을 때 실물경기가 침체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한 경기부양책이 자산가격 상승에 도움을 줬다고 분석할 수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했을 때, 유럽 재정위기가 빚어졌을 때, 미·중 무역분쟁으로 금융시장 혼란이 가중됐을 때에도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통화 완화정책이 이어지면서 자산시장은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다. 수차례의 악재가 발생할 때마다 시행됐던 경기부양책을 통해 금융시장은 반복적인 학습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Bad is Good’이다. 다만 악재가 호재가 되는 역설은 인플레이션이 심해졌던 2022년에는 작동하지 않았다. 실물경기 둔화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인플레이션을 제압할 수 있다면 일정 수준의 경기침체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을 취했다.
지난해 3월 0%였던 미국 기준금리는 1년여 만에 상단을 기준으로 5.0%까지 빠른 속도로 인상됐다. 그렇지만 급격한 금리인상의 부작용으로 빚어진 SVB 파산 사태는 일반적인 성장의 둔화와는 궤를 달리한다. 은행의 위기는 강한 전염성을 갖고 있기에 다른 은행으로 번져나가는, 이른바 ‘연쇄적 뱅크런’과 금융위기로 진화될 수 있다. 성장둔화 우려에도 빠른 금리인상 기조를 이어갔던 연준이었지만 SVB 파산 사태로 빚어진 은행 위기 앞에서는 제롬 파월 의장이 공언했던 0.5%포인트 인상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됐다.
은행 위기가 이어질수록 연준은 기준금리 인상을 멈출 수밖에 없다. 외려 금융시장에서는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까지 예상하는 분위기다. 연방기금 금리 선물시장에서는 올해 7월부터 연준의 기준금리 인하가 시작돼 내년 하반기까지 1.5~2.0% 수준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연준 피벗(통화정책 전환)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자산시장이 뜨겁게 반응하게 된 것이다.
다만 과거와 다른 것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주요국의 물가상승률이 높다는 점이다.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진 상황에서 경기부양을 위해 유동성 공급을 늘리게 되면 물가 상승세를 부채질할 수 있다.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는 지난해 6월 9.1%를 기록한 이후 빠른 속도로 하향 안정화되면서 현재 5.0%까지 낮아졌다. 하지만 자산가격의 급격한 상승 또는 경기부양을 위한 유동성 공급 확대 등이 재개되면 둔화하고 있는 인플레이션이 고개를 들 수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1일 금융통화위원회 정례회의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시장에서 연내 금리인하까지 기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금통위원들은 그러한 견해가 과도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SVB 파산 사태 이후 금융시장에선 ‘Bad is Good’을 기대하고, 중앙은행은 ‘Bad is Bad’를 우려한다. 중앙은행과 금융시장의 동상이몽이 더욱 뚜렷해진 만큼 향후 흐름에 대한 불확실성도 커질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건영 신한은행 WM본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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