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는 왜 性피해자의 몫이어야 했나

김용출 2023. 4. 22.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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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대법 ‘청바지 강간 불가론’
호주의 ‘부부 강간 면제’ 규정 등
성적 취약한 이들에 대한 폭력
이에 맞선 투쟁·판결 사례 열거
“피해근절” 전 지구적 연대 촉구

수치/조애나 버크/송은주 옮김/디플롯/2만7000원

1992년 7월12일, 남부 이탈리아에서 마흔다섯의 운전강사 카르미네 크리스티아노는 운전을 배우던 학생 P.R.를 차에 태워서 외진 샛길로 데려간 뒤 땅에 내팽개치고 강간했다. P.R.는 청바지를 즐겨 입는 남부 이탈리아의 평범한 열여덟 살 학생이었다. 그녀는 얼마간 고민하다가 결국 부모에게 알렸고, 부모는 딸을 경찰에 데려갔다. 크리스티아노는 P.R.와의 성관계를 인정하면서도 상호 동의하에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양한 나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런던대 버크벡칼리지 역사학 교수 조애나 버크는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강간과 수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전 지구적 연대와 유대를 통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진은 많은 시민들이 성폭력 반대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재판과 항소가 끝나면서 크리스티아노에게 징역 2년10개월이 선고됐지만, 1999년 2월 로마대법원은 항소심 판결을 뒤집었다. 처음 희생자가 강간을 즉시 알리지 않은 데 의심을 품은 뒤, 논거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사람은 적극 협조하지 않으면 벗기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 누구나 경험한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즉, 청바지를 입은 여자와 성관계를 했다면, 청바지를 입은 쪽의 도움 없인 옷을 벗길 수 없으니 상호 협의한 게 틀림없다는 취지였다.
로마대법원 결정에 분노가 쏟아졌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많은 나라의 페미니스트들과 이탈리아 정치인들은 로마대법원 결정을 비판하는 한편 희생자에 지지를 보냈다. 이들은 ‘정의를 위한 국제 청바지의 날’을 제정해 반대 운동을 벌여나갔다. 그로부터 10년 만인 2008년, 로마대법원은 성폭행을 당한 열여섯 소녀에 관한 판결을 하면서 비로소 “청바지를 정조대에 비교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조애나 버크/송은주 옮김/디플롯/2만7000원
“기분이 좀 좋지 않고 집에서 사소한 일이 있었다고 아내가 동네 경찰서에 가서 ‘강간을 당했어요’라고 한다면, 침실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법원이 밝혀낼 수 있겠는가…이는 남성에 대해 존재할 수 없는 최악의 차별이다.”

호주 자유당 하원의원 너새니얼 오르는 1981년 4월8일 국회에서 남편에 대한 부부 강간 면제 규정을 폐지한다면 결혼의 기반이 위협받을 것이라고 이처럼 부부 강간 면제를 주장했다. “못된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이유였다.

호주 페미니스트들은 오르 같은 정치인들과 법원이 아내의 신체에 무제한적인 접근권을 옹호한다는 소식에 절망했다. 이들은 피해여성 보호시설을 운영하고 크라우드펀딩 기금을 마련해 영화를 제작해 피해 실태를 알리는 등 정부와 사법부에 맞서 싸웠다. 개혁은 더디게 진행됐지만, 결국 1992년 부부 강간 면제는 폐지됐다.

저자는 책에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강간과 이에 맞선 사람들의 투쟁을 수많은 사례와 수치, 판결 등을 통해 보여준다. 특히 뉴질랜드, 잠비아, 아이티 등 다양한 세계에서 보낸 어린 시절 경험과 런던대 버크벡칼리지 역사학 교수로서의 전문성을 결합시켜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저자는 우선 성학대와 강간 문제를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과 민족, 계급과 카스트, 종교, 장애, 부부, 군대, 자경단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킨 것으로 다룬다. 그러면서 트렌스젠더 성폭력 문제나 성학대에 취약한 남성, 여성 가해자나 무기화된 여성 섹슈얼리티 문제 등 강간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를 다룬다.

특히 ‘성폭력’의 정의와 수량화, 생존자들의 말을 들어주고 보호하기, 언어 네 가지에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폭력의 의학 및 정신의학적 측면을 탐구하는 연구 책임자이기도 한 저자는 강간에 대한 본질적 해결책을 모색한다. 강간과 성 학대는 인간 역사와 문화에서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며 행동을 촉구하는 한편, 성폭력 근절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전 지구적 유대와 연대를 시도하는 ‘횡단의 정치’ 개념을 제시한다.

“반강간 연합을 만들어낼 임무는 참여자들이 자신의 현실에 기반한 위치를 인식하면서도 전략적으로는 성폭력 피해근절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로 통합되어, 차이를 수용해야 한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차이와 불일치를 인정하는 것이 기반이고, 유대를 위하여 공유하는 여성 정체성이라는 계율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강간의 다면성을 다루기 위해 최신 연구 성과를 과감하게 반영한 것이 눈에 띄지만, 오래전부터 논란이 돼 온 요시다 세이지의 주장(본문 320쪽) 등이 인용된 것 등은 아쉽다. 자료를 좀 더 세심하게 접근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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