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는 왜 性피해자의 몫이어야 했나
호주의 ‘부부 강간 면제’ 규정 등
성적 취약한 이들에 대한 폭력
이에 맞선 투쟁·판결 사례 열거
“피해근절” 전 지구적 연대 촉구
수치/조애나 버크/송은주 옮김/디플롯/2만7000원
호주 자유당 하원의원 너새니얼 오르는 1981년 4월8일 국회에서 남편에 대한 부부 강간 면제 규정을 폐지한다면 결혼의 기반이 위협받을 것이라고 이처럼 부부 강간 면제를 주장했다. “못된 여자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이유였다.
호주 페미니스트들은 오르 같은 정치인들과 법원이 아내의 신체에 무제한적인 접근권을 옹호한다는 소식에 절망했다. 이들은 피해여성 보호시설을 운영하고 크라우드펀딩 기금을 마련해 영화를 제작해 피해 실태를 알리는 등 정부와 사법부에 맞서 싸웠다. 개혁은 더디게 진행됐지만, 결국 1992년 부부 강간 면제는 폐지됐다.
저자는 책에서 전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강간과 이에 맞선 사람들의 투쟁을 수많은 사례와 수치, 판결 등을 통해 보여준다. 특히 뉴질랜드, 잠비아, 아이티 등 다양한 세계에서 보낸 어린 시절 경험과 런던대 버크벡칼리지 역사학 교수로서의 전문성을 결합시켜 균형 잡힌 시각을 보여준다.
저자는 우선 성학대와 강간 문제를 젠더와 섹슈얼리티, 인종과 민족, 계급과 카스트, 종교, 장애, 부부, 군대, 자경단 등이 복합적으로 얽히고설킨 것으로 다룬다. 그러면서 트렌스젠더 성폭력 문제나 성학대에 취약한 남성, 여성 가해자나 무기화된 여성 섹슈얼리티 문제 등 강간을 둘러싼 다양한 층위를 다룬다.
특히 ‘성폭력’의 정의와 수량화, 생존자들의 말을 들어주고 보호하기, 언어 네 가지에 각별한 주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성폭력의 의학 및 정신의학적 측면을 탐구하는 연구 책임자이기도 한 저자는 강간에 대한 본질적 해결책을 모색한다. 강간과 성 학대는 인간 역사와 문화에서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며 행동을 촉구하는 한편, 성폭력 근절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위해 전 지구적 유대와 연대를 시도하는 ‘횡단의 정치’ 개념을 제시한다.
“반강간 연합을 만들어낼 임무는 참여자들이 자신의 현실에 기반한 위치를 인식하면서도 전략적으로는 성폭력 피해근절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로 통합되어, 차이를 수용해야 한다. 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차이와 불일치를 인정하는 것이 기반이고, 유대를 위하여 공유하는 여성 정체성이라는 계율을 버려야 함을 의미한다.”
강간의 다면성을 다루기 위해 최신 연구 성과를 과감하게 반영한 것이 눈에 띄지만, 오래전부터 논란이 돼 온 요시다 세이지의 주장(본문 320쪽) 등이 인용된 것 등은 아쉽다. 자료를 좀 더 세심하게 접근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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