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누가 ‘스타켈버그 리더’가 될 것인가
게임이론으로 본 세상
홀드업 문제, 대기업·중기 사이서 발생
현재 한·일 관계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다. 더 큰 그림으로 보면 악화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가운데에 자리한 대한민국의 위치가 전국시대 초나라와 겹쳐지는 측면이 있다. 경제학에서는 국가간의 문제를 다루기 보다는 기업들 간의 문제를 다루는데, 초나라 회왕이 직면했던 문제와 유사한 문제로 경제학의 ‘홀드업(hold-up)’문제가 있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서 하청을 받아서 납품하고 있을 때 발생하는 문제다.
한 중소기업이 A와 B라는 두 대기업에 물품을 납품하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되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대기업인 A로서는 자신의 신제품에 사용될 부품이 필요해서 해당 중소기업에 새로운 주문을 넣었는데 그 중소기업이 A의 경쟁 상대인 B에게 새로운 주문에 대한 정보를 흘리게 되면 신제품에 대한 비밀 정보가 경쟁 상대에게 알려질 위험이 있는 것이다. 대기업인 B로서도 자신의 주요한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이 경쟁상대인 A의 부품도 납품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불편할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해당 중소기업은 A와 B 중 한 곳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것이다. 이것이 냉엄한 현실이다.
물론 중소기업이 A와 B 중에서 한쪽을 선택하기 전까지 A와 B는 해당 중소기업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자기를 선택하라고 회유할 것이다. 그런데, 중소기업이 결국 A를 선택하고 B와의 관계를 정리했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제 해당 중소기업은 다시 B와의 관계를 맺기 어려워질 것이고 A의 입장에서는 중소기업에 대해 독점적인 지배력을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B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과 독점적으로 거래하자고 회유했던 대기업 A는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오히려 중소기업에게 부당한 요구를 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렇게 B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A와 독점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해당 중소기업이 A에게 인질로 잡힌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인질을 의미하는 홀드업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홀드업 문제라고 부른다.
물론 해당 중소기업이 B를 버리고 A를 선택해서 스스로 인질이 된 것이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기업인 A와 B의 입장에서는 두 경쟁 기업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겠다는 해당 중소기업의 태도를 계속 용인하기 힘들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진정한 협력관계가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니 중소기업의 선택이 어리석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현실 경제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서 신뢰에 기반한 원활한 협력이 이루어져야 좋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데, 바로 이 홀드업 문제 때문에 서로를 의심하게 되고 필요한 협력이 이루어지기 힘들게 되면 관련된 기업들의 경쟁력이 모두 하락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학에서 홀드업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 것인가? 홀드업 문제의 가장 간단한 해답은 합병이다. 대기업인 A나 B가 해당 중소기업을 인수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주권을 가진 국가들 사이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홀드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한 국가나 기업이 주도권을 가진 리더가 되어 다른 국가나 기업을 이끄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고백을 하겠다. 경제학에서는 리더나 리더십이라는 단어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이기적인 개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이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 준다는 아담 스미스의 원칙에 따르다 보니 경제 이론은 모두 각자 개인 플레이를 가정으로 한다. 현실에서 팀으로 움직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경우가 많고 팀에는 리더가 있지만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찾기 힘든 단어가 바로 리더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더라는 단어가 한번 등장하는 경제 모형이 있는데 바로 ‘스타켈버그 리더(stackelberg leader)’이다. 스타켈버그라는 독일 경제학자가 처음 생각한 개념이다. 한 마디로 눈앞의 작은 경쟁에서 벗어나서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존재가 바로 스타켈버그 리더이다. 석유를 수출해서 돈을 버는 국가들은 조금이라도 자기의 석유를 더 수출하고자 경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쟁을 하다 보면 석유가 너무 많이 생산되어 석유의 가격이 하락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석유 가격이 하락하면 석유를 수출하는 모든 국가들에게는 손해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 압도적으로 석유의 수출량이 많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의 생산을 줄이는 경우가 많다. 당장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석유의 생산을 줄여서 석유의 수출 물량이 줄어들면 국가의 수입이 줄어들 것이므로 손해이다. 하지만 석유 수출의 압도적 1위를 차지하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의 생산을 줄이면 석유의 가격이 오르게 된다. 아마도 몇몇 다른 국가들도 사우디아라비아의 행동을 보고 스스로 석유의 생산을 줄일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석유의 가격이 올라서 장기적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OPEC 국가들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는 행동을 먼저 하는 국가나 기업을 경제학에서 스타켈버그 리더라고 부른다. 바둑의 명인이 몇 수 앞을 미리 읽고 있듯이 스타켈버그 리더는 몇 수를 미리 내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한·일 모두에게 협력 필요한 건 명백
물론 에콰도르와 같이 작은 국가가 사우디아라비아 흉내를 내어서 스타켈버그 리더가 되려고 시도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리더가 되는 것은 어렵다. 전세계 석유 수출에서 에콰도르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기 때문에 에콰도르가 석유 생산을 줄인다고 해서 석유의 가격이 별로 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타켈버그 리더는 산업을 주도하는 강한 국가 또는 기업이 먼 안목을 가지고 행동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런 스타켈버그 리더의 분석으로 보았을 때 한·일 관계의 앞날은 어떨까. 솔직히 말하면 낙관할 수 없다. 이제 한국의 국력이 많이 강해지고 일본의 국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진 관계로 두 국가 간의 힘이 일방적인 강자와 약자의 관계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스타켈버그 리더는 압도적인 힘을 가진 국가나 기업이 일단 양보를 하고 손해를 감수할 때만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은 현재 압도적인 힘을 가진 쪽이 어느 쪽인지 불확실한 상태이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에콰도르에게 먼저 석유 생산을 줄이고 리더십을 발휘하라고 하면 모두 농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히 누가 봐도 사우디아라비아가 리더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한·일 관계에서는 한국은 어째서 우리가 먼저 양보를 했냐고 대통령을 비난하고 일본은 이제 한국이 일본 수준으로 성장했으니 일본이 먼저 손해를 보면서 리더 자리를 차지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압도적인 힘을 지닌 강대국인 미국이 한국과 일본의 스타켈버그 리더가 되어서 이끌어야 하겠지만, 미국이 제3자로서 한·일 관계의 모든 사항에 관여할 수 없기 때문에 한·일 관계의 홀드업 문제를 푸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협력이 두 국가에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 명백한 만큼 이제는 국력이 성장한 대한민국이 한·일 관계에서 스타켈버그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을 고려해볼 시기가 오고 있다고 생각한다.
☞스타켈버그 리더=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눈앞의 작은 경쟁에서 벗어나 이익을 포기하는 행동을 먼저 하는 국가나 기업을 뜻한다. 독일 경제학자 스타켈버그가 처음 생각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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