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도 허세도 없이 본질에 충실…동물 뼈 같은 가구 디자인 하겠다

서정민 2023. 4. 2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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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형 가구 디자이너 박종선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인 흔들의자 ‘Trans_rocking_01_202303’. [사진 박종선]
“유기체 동물의 뼈 같은 디자인을 하겠다고 늘 생각하죠. 동물의 뼈에는 불필요한 장식이 하나도 없거든요. 필요한 만큼만 진화해 왔으니까. 비움, 미니멀리즘…사람들이 말하는 이런 개념도 이젠 잘 모르겠어요. 본질을 이야기하는 건지, 스타일을 이야기하는 건지. 그저 겨울나무 같은 디자인을 하고 싶어요. 어떤 꾸밈도 허세도 없이 본질에만 충실한 모습.”

오는 30일까지 서울 한남동 뉴스프링프로젝트 갤러리에서 목조형 가구 디자이너 박종선(56)씨의 개인전 ‘형태와 본질’ 전이 개최된다.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 미국 디자인 마이애미, 밀라노 디자인위크 등에 꾸준히 참가하면서 한국적 목가구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소개했던 그가 13년 만에 여는 개인전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 특히 이전의 개인전 제목들이 ‘나무에게 말을 걸다’ ‘소리의 풍경’ ‘소리 나는 목가구’ ‘빛과 소리의 숲’ 등 감성적 분위기였다면, 이번 전시 제목 ‘형태와 본질’은 마치 어떤 선언이라도 하는 느낌이다.

박종선 가구 디자이너.
“나이도 들고, 최근 삶의 큰 전환기를 겪으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가구를 만드는 일을 좋아해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왜 하는 거지, 뭘 해야 하지, 뭘 했지, 이런 질문들이 꼬리를 물더군요. 그 답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내가 지향하는 바를 좀 더 명확히 하고, 후회하지 않을 방법들을 깊이 고민했죠.”

디자인과 관련한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가구제작을 시작한 그는 조선 목가구와 셰이커 가구(18~19세기 미국 그리스도교 종파의 구성원들이 추구했던 가구 유형. 기능적인 부분을 중시하고 불필요한 장식들은 제거한 간소한 디자인이 특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오직 직선만을 이용해 담박하면서도 세련된 미학의 가구를 디자인해 온 것도 이런 레퍼런스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흔들의자(Trans_rocking_01_202303)’를 선보였다.

생선가시처럼 심플한 디자인의 책꽂이. [사진 박종선]
“지난 2월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신 지 두 달 만에 돌아가셨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이별에 황망했고, 개인적으로도 세게 아프면서 생각에 큰 변화가 찾아왔죠. 지금까지 인생을 소극적으로 조심스럽게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충동적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웃음)”

흔들의자의 상판(엉덩이를 걸치는 부분)은 바닥부터의 높이가 낮고 너비는 넓다. 신발을 벗고 완전히 상판 위에 올라앉도록 된 구조로, 등판에 모로 기대면 어머니 품에 안긴 듯한 포즈가 된다.

“오래 전에 스케치를 그려놨지만 실물을 제작하진 않았어요. ‘직선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고집 때문이었죠.(웃음) 그런데 어머니의 죽음으로 모성애를 담은 의자를 충동적으로 만들고 싶었고 바로 실행에 옮겼죠.”

영화 ‘기생충’ 속 부엌 테이블과 의자, 거실 테이블과 조명은 박종선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사진 영화사]
그는 “세월 덕분에 고집도 유해졌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기능이 고정되지 않은, 사용자가 또 다른 쓰임새로 활용할 수 있는 가구’라는 지향점까지 바꾼 것은 아니다. 흔들의자를 수직으로 세우면 등받이가 긴 일반적인 의자 모양이 된다. 옆으로 누이면 테이블로 쓸 수도 있다. 생선 가시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모양의 책꽂이 역시 쓰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책꽂이, TV 장식장, 테이블, 의자가 된다. 미술평론가 오태인씨는 전시 서문에서 “인간의 몸과 가장 밀접하게 맞닿는 가구에는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는 이의 삶의 경험과 논리, 때로는 역사가 체화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며 “어떤 형태가 갖는 고정적인 기능을 거부하는 작가는 유연한 자신의 의지를 사물에 투영해 인간이 사물의 기능에 갇히지 않고 사물 또한 그 형태에 갇히지 않게 한다. 형태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통해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 박종선 작가의 작업이 그렇다”고 말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2019)’에서 큰 역할을 했던 거실 테이블도 ‘박종선다움’에서 출발했다. 하나의 판으로 구성되지 않고, 5개의 상판을 높낮이가 다르게 퍼즐처럼 연결한 테이블은 때로는 의자로, 때로는 의자&테이블로 쓸 수 있다.

영화 ‘기생충’ 속 부엌 테이블과 의자, 거실 테이블과 조명은 박종선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사진 영화사]
“한 가지 층만 갖고 있다면 너무 지루하잖아요. 처음 봉준호 감독이 요구한 건 ‘어쨌든 배우가 숨을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미술감독이 그려온 테이블은 너무 평범한 모양의 사각 테이블이었어요. 너무 뻔하게 숨는 것 같아 재미없었죠. ‘이런 모양이면 꼭 제가 만들 이유가 없다’ 거절했다가, 내가 생각한 테이블을 제안했죠. 다층 구조를 가진 테이블은 그 틈새로 사물을 감추기도, 드러내기도 해서 재밌을 것 같았거든요.”

박 사장(이선균)의 집 거실에 놓인 이 테이블은 기택(송강호)의 가족들이 빈집에서 신나게 놀다가 박 사장 가족이 갑자기 집으로 돌아왔을 때 몸을 숨기는 장면에서 그 ‘틈’ 사이로 쫀쫀한 긴장감을 연출한다. 그는 다양한 레이어가 있는 이 디자인의 영감을 강원도 원주 작업실 근처 폐사지(廢寺址)에서 얻었다.

“‘거돈사지’라고 하는 곳인데 폐허에 남은 돌들은 크기도 높이도 다 다르지만 멀리 보이는 산의 능선과 함께 어울리면서 자연스러움을 보여주죠. 가구의 역할, 즉 형태와 본질은 이런 게 아닐까요. 충분히 기능은 하지만 앞으로 나서지는 않는, 인생을 같이 한 과묵한 친구 같은 존재. 요즘은 과잉의 시대이고 보니 너무 장식적인 가구들이 넘쳐나는데, 이런 가구들에는 싫증도 잘 나죠. 기본적으로 3대가 대물림 할 수 있어야 정말 좋은 가구다 싶어요. 그러려면 기능적 본질이든 시각적 본질이든 본질에 충실해야겠죠.”

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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