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형색색 패션·코트 ‘인스타그래머블 매력’에 빠진 테린이
[스포츠 오디세이] MZ세대 테니스 열풍
MZ세대를 중심으로 부는 테니스 바람이 태풍급으로 격상했다. 젊은이들이 테니스에 꽂히는 이유는 대표적인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인스타그램 하기에 적합하다는 뜻의 신조어)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폼 나는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나 이런 거 한다’며 뽐내기에 테니스만한 게 없다는 것이다. 필드에서 하루 수십만원 쓰고 등골이 휜 골린이들이 ‘골프만큼 간지 나지만 가성비가 좋은’ 테니스로 전향하기 시작했다.
테니스는 고급 스포츠, 귀족 스포츠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테니스는 컬러풀하다. 공은 형광색이고, 코트는 녹색(잔디 코트)이나 파랑색(인조잔디 코트), 자주색(클레이 코트)이다. 테니스복은 단조로운 흰색을 벗어나 형형색색으로 진화하고 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경기에만 집중하던 선수들은 어느덧 모자를 벗어던지고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과 헤어밴드 등으로 감각을 뽐낸다. 깔끔한 셔츠와 팔랑팔랑한 주름치마는 코트에서는 물론 일상에서 입어도 맵시가 난다. ‘인스타그래머블 스포츠’ 테니스는 어디까지 진화할까.
“잘 치고 못 치고 보다 SNS 알리는 즐거움”
지하철 신분당선 광교(경기대)역 인근에 있는 하이발리 테니스장을 찾았다. 상가 건물 4층의 사무실 5개를 터서 풀코트 한 면과 연습용 하프코트 두 곳을 꾸몄다. 요즘 테린이들이 테니스를 배우러 가는 연습장은 대부분 상가 지하에 하프코트를 꾸며 스크린 골프장 비슷한 느낌을 준다. 스크린에 상대편 코트가 나오고, 네트 위쪽에서 기계가 쏴 주는 공을 치면서 기본 자세와 스트로크를 배우는 시스템이다.
한국체대 선수 출신으로 체육학박사인 강혜연 대표는 “실내 연습장 중에서 풀코트가 나오는 곳은 많지 않다. 여기서는 기본기도 배우고 게임도 할 수 있어서 인기가 높다. 하프코트 연습장에서는 몇 달 기본기를 배운 뒤 실외나 실내 풀코트를 섭외해 연습 경기나 실전을 갖는 식으로 한다”고 말했다.
테니스 열풍을 실감하는지 묻자 강 대표는 “부부·친구·연인끼리 게임을 하거나 테니스를 제대로 배우려는 직장인들이 많이 찾아온다. 테니스 라켓이나 용품 중에서 ‘신상’이 나오면 메이커들이 값을 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인기 품목은 몇 달을 기다려서 사야 할 정도다. 연습장이 우후죽순 들어서면서 강사도 부족하다. 정식 선수 출신이 아닌 동호회 출신을 강사로 내세우는 곳도 있는데 그곳에서 잘못 배우는 바람에 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이 연습장의 높이는 4.5m 정도 된다. 천장에는 그물을 쳐 놓았다. 공이 좀 높이 뜨면 천장의 그물을 맞고 촤르르 가다가 코트로 떨어진다. 일반 테니스 코트에서 할 수 있는 로브(상대의 키를 넘기는 샷)를 할 수 없다. 그렇지만 게임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들은 행복한 표정이다. 강사와 1대2로 게임을 하며 레슨을 받는 회원들이 연신 웃음을 터뜨린다. 그중 한 명은 “내 얼굴 공개되면 큰일 난다. 와이프는 내가 지금 직장에서 야근하고 있는 줄 안다”며 웃었다. 그는 “테니스는 기본기를 익히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라켓에 제대로 공이 맞았을 때의 소리와 손맛은 정말 짜릿하다. 멋진 샷 하나를 보여주기 위해 이렇게 시간을 투자한다”고 말했다.
1대2 레슨을 마친 하지선 공동대표와 마주앉았다. 그도 한국체대를 졸업한 박사 출신이다. 하 대표는 “요즘 테니스 하는 분들은 잘 치고 못 치고는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잘은 못 치지만 나 테니스 해’라고 SNS에 알리는 즐거움을 최고로 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공 잘 치는 동호회 1,2위 선수보다 옷 잘 입고 사진발 잘 나오는 사람이 더 인기가 좋다. 기업들도 연예인이나 셀럽, 스타일 좋은 사람에게 의상이나 용품을 협찬한다. 나는 중고 라켓 하나 협찬 받은 적 없다(웃음)”고 했다.
테니스인들 “정현·권순우 이을 스타 필요”
“테니스는 운동량이 많으면서도 순간순간 머리를 써야 하는 운동이다. 거기다 인스타그래머블한 매력도 있어서 젊은 세대가 열광하는 것 같다. 헬스나 필라테스 했던 분들이 테니스로 넘어오는 경우도 꽤 있다”고 강 대표는 말했다.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올림픽테니스코트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이 열린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 2층에 자리 잡은 대한테니스협회 사무실에서 박용국 전무이사를 만났다. 박 전무는 “테니스가 80년대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느낌이다. 테니스 인구가 2~3년 만에 60만에서 100만명으로 늘었다. 서울과 수도권의 실내 연습장은 700~800개 정도로 추산된다. 테니스 용품업계 쪽에 물어봤더니 지난해 동기 대비 매출이 300% 정도 올랐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70~80년대 지어진 대형 아파트 단지는 일정한 규모의 테니스 코트를 조성하도록 정한 의무 규정이 있었다. 이 코트들이 테니스 저변 확대에는 도움이 됐지만 고급스런 이미지의 테니스 문화가 자리잡는 데는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는 게 박 전무의 설명이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이 재개발되면서 테니스 코트는 사라졌다. 땅값이 비싼 수도권에서 개인이 테니스 코트를 운영하는 건 어렵다. 이런 경우 대기업이 인수해 테니스 클럽을 운영하면서 자신들의 브랜드 노출과 젊은층과의 접촉점으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 도심 빌딩 옥상에 루프탑 형태로 코트를 만들거나 홈플러스 같은 대형 마트나 쇼핑몰의 옥상 주차장에 테니스·풋살·3×3농구 등의 시설을 만들어 고객을 모으고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도 요즘 추세다.”
MZ세대가 테니스를 즐기는 방식도 진화했다. 온라인 앱에서 수준별로 커뮤니티를 형성해 교류한다. 회원 한 명이 코트 예약을 한 뒤 ‘내 수준에 맞는 게스트를 모신다’고 공지해서 즉석 시합이 벌어지는 경우도 많다. 경기도 양평이나 가평 같은 수도권 근교에는 골프텔처럼 ‘테니스텔’도 생겨나고 있다. 하루 종일 또는 1박2일 동안 원 없이 테니스를 치고 바비큐 파티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모인다.
테니스 열풍이 한국 테니스 수준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게 테니스인들의 고민이다. 정현(26)이 2018년 호주오픈 4강에 진출했고, 권순우(25)가 그랜드슬램 대회 본선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이들을 이을 스타 재목이 잘 보이지 않는다. 박 전무는 “한솔그룹 조동길 회장이 테니스협회를 이끌던 시절(2003~13)에 중장기 계획을 세워 꿈나무 선수들을 육성하고 유명한 외국 코치를 모셔와 기량 향상을 꾀했다. 그 과정에서 정현·권순우가 나왔다”고 말했다.
테니스인들은 “지금이 한국 테니스가 도약할 절호의 기회”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탁구·배드민턴처럼 프로화를 서두르고, 레슨 강사 자격증도 다양화하고, 굵직한 국제대회 유치를 통해 테니스 문화의 격을 한 단계 높이는 게 당면 과제라고 본다.
■ 테니스 패션, 과거엔 보수적…윔블던은 속옷·경기복 모두 흰색만 허용
요넥스코리아의 김세준 상품기획본부장은 “테니스의 유행은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추세다. 라켓을 비롯한 용품은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고, 테니스 패션 시장도 커지고 있다. 요넥스는 젊은이에게 인기 높은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와 함께 콜라보 제품(왼쪽 사진)을 출시해 호평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요즘은 개인 디자이너가 독자적인 디자인으로 제품을 만들어 온라인에서 파는 마케팅도 자리를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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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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