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을 나온 탕평 군주들, 백성 직접 만나 의견 물었다

2023. 4. 2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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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특강] 근대의 여명 〈상〉
김홍도가 그린 ‘화성행행도’ 8폭 중 하나. 정조가 1795년 2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부친인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화성의 현륭원을 행행(行幸·왕의 궁궐 밖 거동)했을 때를 표현했다. 구경나온 사람들의 분위기가 자유로워 보인다. 정조는 행행할 때 민원을 접수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1960년대 일제 식민주의 역사 극복을 향해 ‘국학 붐’이 일어났다. ‘내재적 발전론’ 의 관점에서 조선 후기 상공업과 실학의 발달에 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서양사와 일치하지 않더라도 근대의 기본 속성에 해당하는 것들이 우리 역사 안에서 생성되고 있었다는 관점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정조대왕 사후 세도정치라는 퇴행적 정치가 펼쳐지고 민란이 일어나는 역사에 부딪혀 걸음이 멈췄다. 1980년대에는 계급 사관 관점에서 민란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민중사관’이 대두하였으나 민중 봉기가 정권 수립에 이르지 못한 사실 앞에서 이 또한 더 나가지 못했다. 그래서 1876년 일본과 체결한 강화도조약을 근대의 기점으로 삼는 방식이 통용되었다. 문호 개방이 근대의 필수조건의 하나이므로 편한 선택이기는 하나, 근대사 연구가 자칫 망국의 과정 추적에 빠질 위험성이 있었다. 다행히 1980년대 민중사학과는 별개로 정조시대의 규장각에 주목하여 규장각 도서로 남아 있는 많은 문헌 자료를 이용한 실증적 연구 성과가 줄을 이어 나왔다. 내재적 발전론이 빠트린 정치사 영역을 채우는 내용이 많아 내재적 발전론을 새롭게 가동할 만한 것이었다.

임진왜란 전후부터 조선의 왕정은 붕당(朋黨)이 공존하는 체제로 이어졌다. 성리학을 공부하는 지식인들이 늘어나 학파가 정파를 형성하면서 상호 비판하는 공존체제가 공도(公道)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데 동의하였다. 농업경제의 발달로 재지 중소지주층의 지식화가 크게 이루어지면서 나타난 변화였다. 그러나 붕당에 비중을 둔 정치운영 방식은 자칫 왕이 보이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없지 않았다.

백성 만나는 왕정, 유교정치의 새 광경

인조반정으로 집권 세력이 된 서인은 붕당정치 원리를 따르면서 집권 기반을 장기화하는 노력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서인은 군주 중심체제보다 재상 중심체제를 지향했다. 성리학을 일으킨 주자가 붕당유용론을 편 것을 근거로 한 움직임이었다. 주자가 구양수의 붕당 긍정론을 지지하면서 “공도 실현을 추구하는 진붕(眞朋)이라면 천자(효종)도 당이 있는 것을 우려할 것이 아니라 당을 함께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진언한 것을 근거로 삼았다. 서인은 외침과 자연 재난이 거듭하는 시국을 6조 판서와 의정 대신들이 비변사에 합좌하여 국정을 풀어가는 체제를 선호하였다. 자당 출신이 합좌 구성에 다수를 차지하면서 집권을 유지하였다. 이 체제가 지속하는 한 왕은 종속성을 면할 수 없었다. 서인은 왕실 혼인을 자파 가문에서 이루어야 한다는 철칙을 암묵적으로 세워 지켰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서인이 이끄는 체제에 대한 비판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13세에 즉위한 임금은 스승 윤휴의 가르침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윤휴는 기호 출신의 남인 대학자였다. 그는 임금과 백성의 관계를 물과 배에 비유하여, 물이 노하면 배가 뒤집히는 이치를 가르쳤다. 16, 17세기는 기온 강하로 인한 자연 대재난의 장기화로 굶어 죽거나 돌림병으로 죽는 자가 한해 100만을 헤아릴 정도였다. 돌림병 때문에 임금이 궁 밖으로 나가는 것도 말렸다. 심지어 종묘에 올리는 의례도 젊은 관리나 환관을 보내 치르는 실정이었다. 윤휴는 백성과 함께하지 않는 임금은 임금이 아니라고 가르쳤다. 이 말에 놀란 숙종은 종묘를 직접 다녀오고 밤중에 미복으로 궁을 나와 여염을 돌면서 백성들이 사는 모습을 직접 살폈다.

그러나 비변사 국정 전담 체제에서 왕은 백성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임금이 19세 되던 해 모후 청풍김씨를 이용한 서인 측의 남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집권 남인 인사 가운데 역모 혐의가 있다고 하여 일으킨 ‘경신대출척’은 왕이 윤휴에게 사약을 내릴 정도로 험악했다. 숙종 28년 기사환국 때 서인 영수 송시열이 사사되면서 두 붕당은 원수 사이가 되었다. 남인에 대한 강·온 양론을 놓고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였다.

숙종 치세에는 대동법의 전국 시행이 완료되고 5군영을 정파 중심에서 국왕 직접 지배체제로 정비하면서 군영 운영비인 군포의 납부 필수를 내리는 조치가 취해졌다. 무엇보다 국가에 대한 의무노동을 없애고 임금제도로 굳혔다. 서인의 왕실 혼인 독점 정책은 정파 대립을 왕위계승권 다툼으로 변질시켰다.

영조 어진(御眞·왕의 초상화). 영조는 종종 궁에서 나와 민심을 청취했다. [사진 국립고궁박물관]
경종이 죽고 영조(재위: 1725~1776)가 즉위한 뒤 4년 만에 임금이 형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는 이유로 소론 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평정한 후 영조는 국정 운영의 국왕 중심체제를 선언하였다. 나는 주자가 아니라 요, 순 시대의 왕정을 조선에 실현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나는 나를 따르는 신하들만 데리고 임금 노릇 하겠다”고 하였다. ‘탕평 정치’가 선언되었다. 탕평은 요·순 시대 왕정의 성공한 상태를 표현하는 수식어 ‘탕탕평평’의 줄임말이었다. 영조의 방침에 따라 각 붕당에는 지지 여부로 완론과 준론의 이름이 생겼다. 한나라 시대 유학이 숭상한 『주례』의 세계 곧 주나라 문왕의 치세를 모범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영조의 존호 52자는 역대 왕 중 최장이었다. 중간 쯤에 ‘요명순철’ 4자가 들어있다. 요·순 임금의 ‘명철’을 체득했다는 뜻이다. 노론 측이 특별히 받드는 주자 일변도의 풍조에 대한 경고장이었다. 내각책임제와 대통령 중심체제의 대결이라면 비약일까.

영조도 아버지 숙종처럼 궁 밖으로 자주 나왔다. 인왕산 아래 경희궁을 새로 짓고 창덕궁에서 오가는 기회를 자주 만들었다. 왕은 운종로 (현 종로) 철물교 (현 탑골공원 부근) 앞에서 늘 어가를 세웠다. 육의전이 즐비하여 상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곳이었다. 임금은 그들에게 고충을 물으면서 “시민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추켜 올렸다. 시민은 시전 상인의 줄임 말이다. 중상주의라면 비약이겠지만 ‘농자 천하지대본’의 시대에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영조의 과단성 넘치는 정치는 세자를 스스로 죽이는 참극을 동반했다. 대리 청정을 맡은 사도세자가 당파 정쟁에 휩쓸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해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였다. 임금이 아들을 처벌하는 형벌이 없어 택한 조치였다. 영조는 전국의 농민 부담인 군포를 2필로 일제히 낮추기 위해 연안 지역의 어장과 염전을 새로운 세원으로 개발하였다. 균역법이란 이름의 세제 개혁은 어장, 염전을 소유한 지방 토호들의 반발을 샀다. 임금은 창경궁 홍화문 앞에 군인, 상인들을 모아놓고 법안에 대한 찬반 의견을 물었다. 국가 원수가 국세 부담자 의견을 직접 듣는 역사적인 자리였다. 세자의 죽음으로 균역법의 난항은 해소되었다. 신하들이 임금을 무서워하였다. 영조는 도망간 노비를 찾지 못하게 하는 법도 만들었다. 왜란, 호란 후 고을 인구의 30%까지 파악되던 노비 인구가 10% 미만으로 크게 줄었다.

정조의 화성 행차, 능행 정치의 절정

1776년 영조가 82세로 승하하고 24세의 세손이 즉위하였다. 정조는 동궁 시절 서재 정이당(貞頤堂)을 규장각으로 확대 개편하고 여기에 일급 신하들을 모았다. 천하의 서적을 모으고 왕정의 역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정책을 개발하는 곳으로 발전시켰다. 군주 중심 정치의 질을 높이는 것이 목표였다. 창덕궁 후원에 새로 지은 본관 건물은 큰 주머니로 합친다는 뜻으로 주합루(宙合樓)라고 불렀다. 이곳은 경연 장소로도 활용하여 군신 간의 정책 토론 장소 기능도 부여하였다. 임금과 신하가 높은 수준의 정사를 함께 하는 전통을 만들어갔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궁 밖 행차를 도성 밖 행차로 발전시켰다. 경기 일대에 산재한 역대 왕들의 능을 찾아 효도한다는 명분으로 ‘능행’을 자주 가졌다. 예컨대 선릉을 참배할 경우, 오가는 시간과 쉬는 곳을 미리 공고하였다. 어가가 쉬는 곳은 민원을 접수하는 장소로 삼았다. 그는 능행을 백성과 만나 그들의 고충을 듣고 풀어주는 기회로 만들었다.

아버지 묘소가 있는 화성 행차가 ‘능행 정치’의 절정이었다. 이때는 충청·전라·경상도 사람들까지 올라왔다. 한강 건너기가 난제였으나 쉽게 해결했다. 경강상인들의 배를 동원해 배다리를 만들고 그들에게 조세 운송 우선권을 주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시간은 저녁 시간으로 잡아 남대문을 들어오면 호위 무사들이 등불을 들게 하고 어가의 창을 열어 불빛으로 임금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를 보려는 ‘관광(觀光)’ 인파가 많을 때는 10만이 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궁 밖을 나와 수많은 백성을 만나는 왕정, 유교 정치의 새로운 광경이었다. 19세기 후손 왕들이 이를 어떻게 계승할지가 조선의 자력 근대화 여부의 입론을 좌우할 문제였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taejinyi4343@gmail.com 학술원회원. 진단학회 회장, 역사학회 회장, 학술단체연합회 회장, 국사편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고종 시대의 재조명』 『동경대생들에게 들려준 한국사』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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