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얀 최후 함께한 오가 노리오, 소니 CD·워크맨 히트시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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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들이 사랑한 오디오
2차 세계 대전의 치열한 기술 경쟁은 종전 후 오디오 산업 혁신을 불러왔다. 나치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독일 오디오 산업은 세계 1위를 달성했고 미국은 LP, 스테레오, 헤드폰, FM 라디오 기술을 쏟아냈다. 일본에서는 소니라는 거성이 탄생했다. 소니하면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 모리타 아키오를 먼저 떠올리지만 실제 소니의 혁신을 견인한 이는 기업인이자 음악인 오가 노리오(大賀典雄)다.
소니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는 와세다 대학 시절 ‘천재 발명가’로 불렸다. 졸업 후 그는 재능을 살려 레이더 발진기를 제작해 일본 해군에 공급했는데 당시 해군 담당자가 모리타 아키오였다. 두 사람은 일본 패전 후 의기투합해 오디오 기업 ‘도쿄 통신 공업’을 창업한다. 첫 제품은 오픈 릴 테이프 레코더 ‘G형’이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반응을 얻었지만 세계 진출을 꿈꾸던 모리타 아키오는 만족할 수 없었다.
오가가 만든 스튜디오, NHK가 사용
오가 노리오는 중학교 2학년 때 늑막염에 걸려 학교를 쉬어야 했다. 이 때 그의 벗이 되어준 이는 이웃 이와이 이치로다. 이와이 산업의 후계자이자 도쿄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던 이치로는 오가에게 전기 회로도를 읽고 제품을 제작하는 방법과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며 오페라 악보를 읽는 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이 때 오가 노리오는 클래식 음악의 매력에 눈을 뜨고 자신의 오디오를 직접 제작할만큼 실력을 키운다.
오가 노리오는 성악 실력을 키우기 위해 당시 미국에서 인기끌고 있던 오픈 릴 테이프 레코더가 필요하다고 학교에 요구했고, 학교는 도쿄 통신 연구소의 모델 G를 구입한다. 모델 G는 미국 암펙스 제품을 모방한 첫 제품인 탓에 문제점이 많았다. 이를 묵과할 오가 노리오가 아니었다. 회사를 직접 찾아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고 해결 방안까지 일러준다. 어린 학생의 당돌함과 천재성 모두에 반한 소니 창업자 2인은 그에게 아르바이트를 제안했다. 이렇게 소니와 오가의 오랜 인연이 시작된다.
오가 노리오는 1954년 졸업과 함께 독일 베를린 국립예술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유학 중에도 소니와의 관계는 지속되어 그들의 유럽 비즈니스를 돕는다. 유학 기간 중 선배 다나카 미치코의 소개로 지휘자 카라얀을 만나는 기회를 얻었고, 둘은 친밀한 사이가 된다. 1958년 베를린 국립예술대학 수석 졸업 후 귀국한 그는 퇴근 후 얼마든지 음악 활동을 해도 좋다는 모리타 아키오의 끈질한 구애에 넘어가 소니에 입사한다. 그는 신제품 개발 및 디자인을 총지휘했고, 능력을 인정받아 1962년 최연소 임원에 오른다.
1975년 소니는 유럽 유통망 확장을 위해 독일 가전 기업 베가(Wega)를 인수했다. 이때 오가 노리오는 베가의 디자인을 담당한 디자이너 하르트무트 애슬링거를 마주한다. 그의 재능을 높이 산 오가는 애슬링거를 소니 디자인 고문으로 위촉하고 전권을 일임한다. 80년대를 풍미한 고혹적인 소니 TV의 디자인은 이렇게 탄생했다.
오가 노리오의 진가가 빛을 발한 것은 콘텐트 비즈니스다. 그는 소니의 혁신적인 제품이 시장에 빠르게 안착하려면 콘텐트 확보가 필수라 보았다. 이에 1968년 CBS 레코드와 공동 투자해 CBS 소니 레코드를 설립한다. 그의 노련한 경영 아래 이 회사가 일본 음반 시장 1위를 달성하자, 고무된 CBS 본사는 배당금 200% 인상을 요구한다. 오가는 1988년 임원진 반대를 무릅쓰고 30억 달러에 CBS 레코드 인수를 강행했고, 이 판단은 옳았다. 3년 후 소니뮤직레코드가 도쿄 증시에 상장해 인수 금액의 5배를 회수한 것이다.
오가 노리오는 오디오 기술에도 깊이 관여했다. 1966년 필립스와 함께 카세트 테이프 규격을 제작해 이후 워크맨 히트의 기반을 다졌다. 1975년 디저털 레코딩 기술 개발에 성공한 오가는 필립스와 다시 한 번 콤팩트 디스크(CD) 규격을 준비한다. 당시 필립스는 CD 수록 시간으로 60분을 제안했지만 그는 음악가의 기질을 살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기록할 수 있는 75분을 주장했고, 카라얀도 동의하면서 결국 75분으로 결정됐다.
CBS 레코드 인수 등 콘텐트 확보도
CD 기술은 완성됐지만, 소니를 시기한 경쟁자의 견제와 방해로 좀처럼 표준화에 이르지 못했다. 이 때 카라얀이 구원 투수로 등판했다. 자신이 주재하는 잘츠부르크 부활절 음악제를 통해 소니와 필립스가 CD를 세상에 천명할 수 있도록 자리를 제공한다. 또 CD에 미온적이던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앞으로 CD 아니면 음반을 발매하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놓는다. 홍보 대사를 자처한 카라얀 덕분에 CD가 시장에 빠르게 안착할 수 있었던 셈이다.
이처럼 오가 노리오는 카라얀과 깊은 교분을 나눴다. 카라얀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것도 그다. 1989년 7월 오가는 잘츠부르크의 카라얀 자택을 방문했다. 환담을 나누던 중 주치의가 방문하자 “오가 노리오와 이야기할 때는 중국 왕이라 해도 방해할 수 없지”라며 돌려보냈다. 이후 이야기를 나누며 물 한 잔을 들이키던 카라얀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카라얀을 진심으로 존경한 오가는 그 충격으로 2주 동안 병원에 입원해 심장 치료를 받아야 했다.
소니의 히트작 워크맨도 오가 노리오가 CD에 몰두하던 중 우연히 개발한 제품이다. 출장 중 비행기에서 들을 수 있도록 카세트 테이프 레코더를 재생 전용기로 개조해 달라는 이부카 마사루의 요청에 오가는 자사 레코더에서 녹음 기능을 빼고 헤드폰이 연결 가능하도록 개조해 워크맨 원형을 개발한다. 이를 우연히 본 모리타 아키오가 한 눈에 반해 제품화를 지시했고, 워크맨이 탄생했다. 이후 30년간 워크맨은 2억 대가 넘게 팔리며 소니 최고의 히트작이 되었다.
오가 노리오는 2003년 소니 명예 회장에 취임하며 다시 음악가로 돌아갔다.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회장 및 이사장을 맡아 객원 지휘자로 활동했고, 베를린 소니 센터 개막식에서 그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베를린필하모닉 지휘를 맡는 영광을 누렸다. 건강 악화로 휴양지 가루이자와에서 요양했던 그는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돼 퇴직금 16억엔(약 160억원)을 쾌척, 2005년 800석 규모의 클래식 콘서트홀 ‘오가홀’을 완성했다.
오픈 기념 공연은 오가와 가까웠던 지휘자 정명훈이 맡았다. 오가는 지난 2011년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조성진 등 유명 음악인들이 오가홀을 찾는다. 소니의 혁신을 주도한 오가 노리오의 음악 사랑이 오가홀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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