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9시. ‘출근’ 시간이다. 같은 시각. ‘퇴근’하는 이들도 있다. ‘출근자’와 ‘퇴근자’가 마주친다. 인사를 나눈다. “아직도 밤에는 춥죠?” “춥지만 재밌잖아요. 그런데 ○○○○ 무섭지 않으세요?” “무서워서 하는 거잖아요. 배낭 무거워도 ○○○하는 것처럼요.” 일요일이었던 지난달 26일 아침. 정상원(52·서울 강서구)씨와 임솔희(39·서울 마포구)씨의 대화다. 휴일의 발전소 3교대 근무자들도 아니고, 이들은 왜 주말에 ‘출퇴근’ 하는가. 그것도 경기도 용인 조비산(295m)에서. 또 ○○○○과 ○○○은 무엇인가.
백패킹(backpacking). 직역하면 ‘배낭여행.’ 하지만 배낭여행은 1990년대부터 해외에서의 생고생 여행을 뜻했으니 백패킹과는 의미상 다른 길로 갈라졌다. 백패킹은 1박 이상을 위해 온갖 장비를 배낭에 싸서, 메고, 떠나는 여행이다. 삶 자체가 백패킹이었던 초기 인류(수렵과 채취), 고개를 넘으며 업무상 백패킹을 해야 했던 옛 상인들도 있었으니. 역사로 따지면 길다.
하지만 최근 10년간 대한민국에서 신성한 레저로 뜬 건 분명하다. ‘성지(聖地)’까지 조성돼 있으니까. 덕적도나 굴업도(이상 인천), 비양도(제주)·선자령(강원)·호명산(경기) 등이 그 성지로 꼽힌다. 하지만 최근 은근슬쩍 뜨는 백패킹 장소가 있다. 이름하여 ‘백패킹 신(新)성지’ 5곳을 추렸다. 모두 산이다. 그러니, 호흡 가다듬고 볼 일이다.
조비산은 용인8경 중 한 곳. 정상 직전 큼지막한 동굴이 있다. 전용면적 59㎡(25평)쯤 된다. 현관 격인 동굴이 있고, 안방 격인 동굴이 이어진다. 이 1+1 동굴은 과거 채석장이었다. 클라이머들이 먼저 길을 닦았다. 1980년대부터 루트(바윗길)들이 만들어졌지만 방치되다가 2011년부터 본격적인 세팅(루트를 만드는 행위)이 이뤄졌다. 약 10여년 뒤인 2020년 전후로 백패커들이 슬금슬금 찾아왔다. 요즘은 줄을 서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자리가 꽉 찬다.
이곳에 몇 가지 국룰(국민 룰. 불문율의 다른 표현)이 있다. 국룰 1번은 순서. 백패커들은 줄을 서지 않는데도 서로 순서를 기가 막히게 안다. 국룰 2번은 시간 준수. 클라이머들은 오전 9시~오후 6시 등반을 한다. 백패커들은 오후 6시~다음날 오전 9시 백패킹을 한다. 앞서 말한 정씨는 동굴에서 클라이밍을 위해 오전 9시에 ‘출근’했고, 임씨는 같은 시각에 동굴에서 백패킹을 마치고 ‘퇴근’한 것. 이쯤 되면 순조로움을 넘어 평화로운 교대다.
백패킹은 25평 동굴에서도,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서 만나게 되는 ‘별채’ 격인 정상 데크에서도 이뤄진다. 산은 낮지만 사방이 평지라 전망이 시원하다. 정상에서 별을 헤느냐, 동굴에서 이색 체험을 하느냐. 고민이 될 듯. 근처 축사에서 분뇨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지만, 백패킹·클라이밍을 향한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잊지 말자, 백암순대. ‘교대 시간’이 빠듯해 조비산에서 아침을 못 챙겼다면 더 당길 수 있다. 경쾌한 국물과 풍만한 순대를 목젖 뒤로 넘기면, 조비산(鳥飛山) 그 이름처럼 날아갈 듯할 것이다.
백패킹, 야영 장비 메고 떠나는 여행
“역시 느낌이 왔어요. 멀리서 (데크를) 발견하고 올라왔는데, 대박이네요.”
이원규(33·서울 용산구)씨는 생애 첫 백패킹 장소로 전북 군산의 고군산군도를 찾았다. 미국의 CNN은 지난해 12월 아시아에서 저평가된 관광지를 꼽았다. 그중의 하나가 고군산군도다.
그런데 왜 군산도 앞에 고(古)가 붙었을까. 원래 ‘군산도’는 선유도를 가리켰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고군산군도(2000)』에 “조선 태조 때 군산도에 설치한 만호영(萬戶營, 수군의 최전방 진영)이 세종 때 진포(현재의 군산)로 옮기면서 ‘고(古)군산도’가 됐다”고 적는다. 하지만 김종수 군산대 역사철학부 교수는 『군산의 역사와 인물(국학자료원)』에서 “이미 1380년 고려 우왕 때 왜구 1만여 명의 침입으로 군산도의 수군 진영이 와해하고, 군산에 새로운 진영(군산진)을 구축했다”며 “조선 후기 들어 군산의 경제·군사적 가치가 커지자 군산진만으로는 감당이 안 돼, 인조 2년(1624년)에 별도의 진을 군산도에 설치하면서 고군산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57개 섬으로 이뤄진 고군산군도의 으뜸은 단연 선유도다. 그런데 CNN의 분석은 외국인에 의한 글로벌화된 시각임이 분명하다. 지난해 선유도에는 233만 명이 찾았다. 전국 2634곳의 주요 관광지점 중 5위다. 관광시설로 분류된 1~4위 에버랜드·강구항·엑스포해양공원·롯데월드를 빼면 자연생태환경으로는 1위다. 2020년에는 288만명(2위)이 찾기도 했다. 이쯤 되면 국내에서는 숨겨진 명소가 아니다. 고군산군도 하면 선유도, 선유도 하면 망주봉이다.
고군산군도는 왜구가 들끓어 초토화된 역사와 아울러 이름난 유배지였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에는 103명이 유배 왔다고 전한다. 망주봉은 이곳에서 유배자들이 주상(임금)을 그리워했다며 붙은 이름인데, 명사십리해수욕장(선유도해수욕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바로 앞에 뜬금없이 솟아있다. 난데없는 비경이다.
이씨가 찾은 백패킹 신성지는 선유도 최고봉인 남악산(156m) 대봉이다. 명사십리해수욕장과 망주봉을 굽어볼 수 있다. 멀리 군도를 띄우고 있는 바다로 눈 호강을 할 수 있으니 뷰(view)의 성찬이다. 대봉은 남악산 정상보다 4m 낮은 해발 152m. 하지만 만만하게 볼 높이는 아니다.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않은가. 해발 0m 즈음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섬의 산은 힘들다고.
아예 높은 곳, 그러니까 ‘고원’에서 백패킹을 시작하기도 한다. 전북 진안·무주·장수에 걸쳐 있는 진안고원은 해발 300~500m를 오간다. 이곳 사람들은 ‘북에는 개마고원, 남에는 진안고원’이라고 말한다. 자부심이다. 백패킹 전문가 민미정(43)씨는 백패킹 신성지로 진안의 운장산(1126m)과 부귀산(806m)을 꼽았다. 고원의 일교차는 즙 충만한 사과와 살진 더덕을 만든다. 요새 같이 익은 봄날엔 새벽 운해도 피운다. 한폭 수묵화다.
민씨는 또 충북 옥천 어깨산(441m)도 추천했다. 그는 “어깨산은 낙조와 일출을 모두 보여주는 장관이 펼쳐진다”고 말했다. 가볍게 말하자면 일타쌍피다.
흔적 남기지 말기, 배려·존중 일깨워
“가볍게 다니자는 BPL이 유행이지만, 음식 욕심이 나서 쉽지 않네요.”
백패킹 방법에도 흐름이 있다. BPL (Backpacking Light) 바람이 분다. 가급적 무게를 덜고 다니자는 것이다. 심지어 UL(Ultra Light)도 있다. 극도의 경량화다. 하지만 ‘백패킹 요리사’ 양선아씨는 손사래를 쳤다. “백패킹은 대부분 숙박비 0원이지만, 먹는 것만큼은 돈 들여 확실히, 맛있게”라면서다. 곶감호두말이·사과브리치즈·빵모닝 등 그가 인스타그램에 올린 백패킹(일부는 캠핑) 요리가 화려하다. 그에게는 백패킹 요리 철칙이 있다. 되도록 비화식으로. 일회용 대신 다회용 용기로. 양씨는 “모두 자연을 위한 행동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흔적 남기지 말기”라고 말했다.
흔적 남기지 말기는 LNT(Leave No Trace)로도 부른다. LNT는 1980년대 후반 미국에서 시작된 아웃도어 보존 운동이다. LNT는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한 배려와 존중이다. 백패킹 유행은 우리나라에도 LNT에 대한 경각심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LNT는 조비산 백패킹의 국룰 3번이자, 모든 아웃도어의 국룰이다. 오늘(4월 22일)이 '지구의 날' 아닌가.
조비산의 토요일 오후. 대전에서 온 백패커 김모(32)씨는 오후 3시에 도착했다. 클라이머들의 퇴근 시간이 오후 6시이니, 3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지루하지 않으냐는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다른 사람의 취미를 존중해야 나도 존중받는다”고. 아차 싶었다. 백패킹 하느라 몸은 조금 불편할지언정, 배려와 존중은 마음의 편안과 여유로 이어진다. 해가 진다. ‘정말’ 퇴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