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할 자유가 혁신의 모태

한경환 2023. 4. 22.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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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에 대한 모든 것
혁신에 대한 모든 것
매트 리들리 지음
이한음 옮김
청림출판

‘혁신’을 빼고는 현대 기업의 생존을 생각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일상생활에서도 우리는 챗GPT, 자율주행차 등 혁신을 매 순간 피부로 느끼고 호흡하며 살아간다. 자연의 진화도 혁신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류처럼 스스로 기술이나 도구를 혁신할 수 있는 종(種)은 없다.

『혁신에 대한 모든 것』(원제 How Innovation Works)은 인류사와 더불어 함께해 온 혁신을 다룬 ‘혁신학’ 참고서다.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세계적 과학저술가인 저자가 역사의 전환점마다 큰 역할을 한 혁신에 얽힌 깊이 있는 탐구를 맛깔나는 글솜씨로 수놓은 역작이다. 진화생물학, 고고학, 기술, 경제, 사회 등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날카로운 통찰이 곳곳에서 번득인다. 혁신을 목숨처럼 여기는 기업 관계자나 과학자는 물론 현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도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진화를 통한 생물학적 혁신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혁신은 전부 ‘있을 법하지 않은’ 향상의 형태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에는 에너지부터 공중보건, 교통, 식량, 통신과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혁신 스토리가 망라돼 있다. 아울러 이 책은 혁신의 특징을 이론적으로 정립한다. 혁신정신이 시들해지고 있는 지금의 혁신기근 현상에 대해서도 따끔하게 지적한다.

라이트 형제가 1903년 첫 동력 비행에 성공한 ‘라이트 플라이어’. 미국의 스미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에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증기기관을 만든 제임스 와트나 전구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 천연두 백신 접종을 시험한 에드워드 제너 등 각 분야 엘리트들이 영예를 가져가기 이전에, 혁신의 씨앗은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먼저 뿌렸다. 혁신에서 유레카의 순간은 드물다. 컴퓨터는 하루 전까지는 없다가 바로 그다음 날 떡하니 나타나지 않았다. 인위적인 기술이 더 이전의 인위적인 기술로부터 진화했다.

라이트 형제가 키티호크에서 비행에 성공한 순간은 몇 년 동안 힘들게 뚝딱거리면서 고치고 또 고친 끝에 비행기를 몇 시간 동안 떠 있게 하는 법, 맞바람이 없이도 이륙하는 법, 선회하고 착륙하는 법을 알아낸 뒤에나 나왔다.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의 발견도 마찬가지. “이는 그저 오랫동안 끙끙거리면서 점점 나아가는 발견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일화에 불과하다.”(개러스 윌리엄스 『이중나선 풀기』)

기술들의 재조합인 혁신은 많은 시행착오를 수반한다. 에디슨과 그의 연구자들은 전구 필라멘트를 만들기 위해서 6000가지 재료를 시험했다. 에디슨은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그저 작동하지 않는 1만 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이다”고 말했다. 셰일가스 추출을 위한 수압파쇄법 개척자들은 우연히 딱 맞는 방법을 발견했고 무수한 실험을 통해 서서히 개선했다.

실수가 혁신의 중요한 일부라면, 미국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는 사업실패를 비교적 관대하게 보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미국 대다수 주에서 파산법은 혁신가들이 실리콘밸리의 표어처럼, 빨리 실패하고 자주 실패할 수 있게 허용한다. 실패의 자유는 혁신의 모태가 된다.

혁신은 예측 가능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최고 경영자 스티브 발머는 2007년 “아이폰의 시장 점유율이 의미 있는 수준까지 올라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전혀”라고 말했다. “때로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려면 도리어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스웨덴 작가 얄마르 쇠데르베리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제임스 와트에 앞서 증기기관을 선보인 토머스 뉴커먼에서 애플의 스티브 잡스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혁신가들은 유행에 뒤떨어진 분야에서 연줄도 없고 교육도 제대로 못 받고 눈에 잘 안 띄는 상태로 출현하곤 했다. IBM은 MS에 자리를 내주었고 MS는 구글과 애플에 기습당했다. 코닥은 영화 업계에 튼튼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으면서도 디지털 사진술을 개발하지 않았다. 전자업계에서 온 침입자 때문에 자사의 사업 모델 전체가 무너져 사라질 지경이 될 때까지 겁에 질려서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2012년 파산 신청을 해야 했다.

대기업은 혁신을 잘 못한다. 너무 관료주의적이고, 기득권이 워낙 커서 현상 유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혁신이 번창하려면 외부인, 도전자, 교란자가 발판을 마련하도록 장려하거나 적어도 허용하는 경제체제가 필요하다. 이는 경쟁에 개방적이어야 함을 의미하는데 역사적으로 그런 특징을 지닌 사회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1700년 이후 혁신은 눈부신 성과를 보였지만 지금은 혁신 위기의 시대라는 주장도 나온다. 대기업이 거대 정부와 편안하게 한 통속이 되어 점점 시장을 지배해 나가면서 기업 경영자주의는 기업의 활력을 서서히 좀먹고 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많은 나라가 혁신을 장려하기보다는 혁신을 제약할 방법을 더 궁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모두 혁신 DNA가 약화된 사이, 비록 권위주의적이고 불관용적인 정치시스템을 갖고 있긴 하지만 중국이 혁신 엔진에 불을 붙이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국의 혁신 동력은 제대로 가동되고 있는지 돌이켜볼 일이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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