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인과의 만남, 통신사와의 믿음
손승철 지음
역사인
월드컵에서,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을 만난다면. 예선이든 본선이든, 양국의 세계 순위가 어떻든 ‘숙명의 라이벌’ ‘운명의 한판’이란 말이 버릇처럼 나온다. 스포츠를 넘어, 숙명과 운명은 한일관계의 수식어인가. 어쩌다 이런 말이 붙게 됐을까.
사학자로 한일관계를 전공한 저자는 양국관계의 어제와 오늘을 파고들고 내일을 내다본다. 그 ‘어제’는 2000년 전부터 시작한다. 벼농사와 철기, 청동기 문화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들어가면서다. 일본 쪽에서는 ‘들어간’ 게 아니라 ‘들어온’ 것이니, 그 주역으로 ‘도래인(渡來人)’이란 표현을 쓴다. 도래인은 한국과 일본의 본격적 만남을 성사시킨 장본인이다. 8세기 일본 인구 600만 명 중 200만 명이 도래인이었단다.
저자는 만남·적대·공존·상처·화해 등 다섯 가지 키워드로 한일관계를 풀어낸다. 도래인과 야요이·아스카문화에서 시작해 임진왜란·을사늑약을 거쳐 한일기본조약·징용·징병·위안부·역사교과서·독도에 이른다. 이 책은 저자가 40여년 쌓아온 연구에 바탕을 둔 한일관계 2000년 통사다.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많다. 왜의 사이메이(濟明) 천황은 7세기 스러져가는 백제를 도와주러 나섰다가 본인이 쓰러졌다. 상복을 입은 채, 태자 나카노오에(中大兄)는 백제에 5000명을 보냈고, 덴지(天智) 천황으로 즉위한 뒤에는 2만 7000명을 다시 보냈다. 그러나 나당 연합군에게 궤멸된다. 왜는 왜 악착같이 백제를 도와주려고 했을까. 이 무렵 왜는 ‘일본’으로 이름을 갈아탄다. 율령을 정비한다. 당은 대등한 국가로, 신라·발해는 오랑캐이자 조공국으로 표현한다. 한일관계 적대와 갈등의 시작 아니었을까.
조선의 통신사(通信使)는 임진왜란 이후 도적을 살펴본다는 뜻의 탐적사(探賊使)로, 다시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일본의 국서에 답하고 피랍인을 데려오는 사절단)로 바뀌었다. 그런데 1636년부터는 통신사로 되돌아왔다. ‘그래도 믿는다(信)’는 외교적 제스처였을까.
저자는 통신사의 길을 여러 차례 답사했다. 그에게 한일관계의 미래에 대해 물어봤다. “역사를 사법적 판단에 기댈 수 없어요. 반성·사과·용서·화해의 방정식을 풀어야죠. 일본과 시담을 나누면서도 실리와 명분을 챙긴 통신사처럼요.”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