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한 여자만 그렸는데 사이는 나빴다고? 에드워드 호퍼의 7가지 사실

2023. 4. 2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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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최대 화제의 전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에드워드 호퍼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부분확대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출판계에 에드워드 호퍼 그림이 표지에 나오면 책이 더 잘 팔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도시의 고독을 그린 화가’ 호퍼(1882-1967)는 한국에도 팬이 많다. 그래서 그의 국내 최초 회고전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는 올해 최대 화제의 전시로 손꼽힌다. 아니나 다를까 전시 개막일인 20일, 평일인데도 1800여 명의 관람객이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을 찾았다. 예매 인원은 13만 명에 달한다. 호퍼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가장 많이 갖춘 뉴욕 휘트니미술관과의 협업 전시로서, 가장 유명한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1942)은 시카고미술관 소장품이라 오지 않았지만, 호퍼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으로 뽑은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을 비롯해 여러 주요 작품이 휘트니에서 날아왔다. 20세기 미국 풍경을 그린 화가 호퍼가 21세기 한국인에게까지 이토록 인기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중앙SUNDAY가 호퍼에 대한 7가지 사실로 그 이유를 풀어보았다.

1 고독한 그림이 명랑한 광고와 잘 맞은 이유

에드워드 호퍼 ‘이층에 내리는 햇빛’(1960)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차용한 ‘쓱 SSG’광고(2016)의 한 장면. [사진 유튜브 캡처]
호퍼가 한국에서 유명해진 건 2016년 그의 그림들에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쓱 SSG (신세계 온라인 쇼핑몰)’ 광고가 대박을 치면서였다. 호퍼의 그림들은 구도가 심플하면서 연극의 한 장면처럼 드라마틱하고 크고 밝은 색면이 시원스러운 쾌감을 주기에 광고에 잘 녹아들었다. 사실 호퍼는 전업 화가가 되기 전에 광고·잡지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다. 보는 이의 눈을 빠르게 휘어잡아야 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의 감각이 그의 과묵하고 고독한 그림에 은근히 살아있는 것이다. 호퍼 자신은 그 일을 무척 싫어했지만 말이다. 이번 ‘길 위에서’ 전시는 제7섹션(호퍼의 삶과 업)에서 그의 광고·잡지 삽화를 다수 보여준다. “훗날 그의 주요 작품에 나타나는 구도와 모티프를 이 삽화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고 전시를 기획한 이승아 학예연구사가 말한다. 비록 싫어하는 일이었지만 창작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2 늦게 성공했는데 유화가 아니었다

에드워드 호퍼의 수채화 '석회암 채석장'(1926)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에드워드 호퍼의 수채화 '맨해튼 다리'(1925-26)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호퍼는 전업 화가가 되는 게 소원이었지만 10년 간 작품을 한 점도 못 팔았기에 일러스트레이터 일을 때려치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그가 전환기를 맞은 것은 마흔이 넘어서였다. 항구도시 글로스터에서 여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마침 거기에서 뉴욕예술학교 동창 화가 조세핀을 만났다. 그녀의 영향을 받아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주선으로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수채화들을 선보일 수 있었다. 여기에서 호평을 받고 작품이 미술관에 팔리면서 용기를 얻은 호퍼는 드디어 전업 화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길 위에서’ 전시에서 호퍼의 수채화를 여러 점 볼 수 있는데, 일반적인 수채화와 다르며 햇빛을 받은 사물의 표면과 그림자의 표현이 놀랍다. 이들을 보면, 초기에 프랑스 인상주의 아류에 불과했던 호퍼의 유화가 특유의 맑고 넓은 색면의 유화로 진화하는 데 수채화 창작이 영향을 미쳤다고 짐작해볼 수 있다.

3 한 여자만 그렸는데 사이 나빴다고?

에드워드 호퍼 '햇빛 속의 여인'(1961) [휘트니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그 이듬해, 호퍼는 조세핀과 결혼했다. 둘 다 마흔을 넘긴 나이여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만혼이었다. ‘조’라는 애칭의 조세핀은 평생에 걸쳐 호퍼의 중요한 조언자이자 모델이 되었다. 호퍼 그림 속의 거의 모든 여성은 조를 모델로 그린 것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햇빛 속의 여인’(1961)도 그렇고, 특히 ‘이층에 내리는 햇빛’에서 늙은 여인과 젊은 여인이 모두 조를 모델로 한 것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매우 사랑 넘치는 부부로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호퍼가 매우 자기중심적인 데다가 둘은 외모부터 성격까지 정반대였다. 호퍼는 2m 가까운 키에 돌덩어리처럼 느리고 과묵했고, 조는 152㎝ 키에 새처럼 재빠르고 쉴 새 없이 지저귀는 성격이었다. 조는 남편과 대화하는 게 “그냥 우물에 돌을 던지는 것 같아. 차이점이라면 우물에 던진 돌과 달리 쿵 소리도 안 난다는 거지”라고 불평했고, 호퍼는 “여자 하나와 사는 건 호랑이 두세 마리와 사는 것과 맞먹어”라고 투덜거렸다. 둘은 몸싸움까지 동반한 격렬한 부부싸움을 벌이곤 했다.

에드워드 호퍼 '트루로 집에서 스케치하는 조' (1934? 38)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그럼에도 이 부부는 해로했다. 늘 참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커리어를 희생한 조가 양보한 측면이 컸던 것 같다. 호퍼가 84세에 세상을 떠나자 불과 열 달 뒤에 조도 세상을 떠났다. 그만큼 강렬한 애증의 관계였던 것일까. 이번 전시의 제6섹션 ‘조세핀 호퍼’에서 조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호퍼의 스케치와 조가 꼼꼼히 기록한 호퍼의 작품 장부, 둘이 함께 본 수많은 연극 티켓을 볼 수 있다. “아마 연극 보는 순간에 가장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을까”라며 이 연구사는 웃었다.

4 ‘싸이코’ 감독 히치콕과는 무슨 관계

호퍼 ‘밤의 창문’(1928).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히치콕 영화 ‘이창’(1954)의 한 장면. [사진 구글 캡처]
누아르 영화를 좋아했던 호퍼와 앨프리드 히치콕은 서로의 팬이었다. 히치콕의 공포 스릴러 걸작 ‘싸이코’(1960)에 나오는 으스스한 집은 호퍼의 첫 주요작 ‘철길 옆의 집’(1925)을 모델로 한 것이다. 이 그림은 이번 전시에 포함돼 있지 않지만, 히치콕의 또 다른 명작 ‘이창’(1954)에 영감을 준 호퍼의 그림을 전시에서 볼 수 있다. 바로 ‘밤의 창문’(1928)이다.

‘이창’은 다리를 다쳐 한동안 집을 못 나가게 된 남자가 심심한 나머지 건너편 아파트 이웃들의 다양한 일상을 훔쳐보다가 살인사건을 목격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타인의 내밀한 삶을 엿보고 싶어하는 인간의 관찰자적(좋게 말하면), 관음증적(나쁘게 말하면) 욕망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다. ‘밤의 창문’ 역시 그런 그림이다. 아마 이 그림은 호퍼의 다른 많은 그림들처럼 그가 고가 전철을 타고 가다 우연히 본 장면에 인상을 받아 재구성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감시와 엿보기와 관련한 여러 범죄가 떠오르며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그것을 의식한 듯, 호퍼의 팬인 소설가 겸 미술가 조너선 샌틀로퍼가 이 그림에서 영감 받아 쓴 단편소설은, 한 여성이 성범죄자 남성의 엿보기 습관을 역이용해서 복수를 하는 내용이다.

5 호퍼 그림으로만 이루어진 영화도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장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셜리에 관한 모든 것 Shirley'(2013)의 한 장면 [구글 캡처]
히치콕 영화뿐만 아니라 리들리 스콧의 SF 걸작 ‘블레이드 러너’(1982) 등 여러 중요한 영화가 호퍼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사실주의적이라 영화 장면으로 재현하기 쉬우면서 동시에 상징주의적이기 때문이다. 호퍼 그림의 텅 빈 건축 공간, 거기에 빛이 만들어 놓은 사각형, 상념에 잠긴 인물들은 한데 어울려 복합적인 관념과 정서, 그리고 수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창출해낸다. 그래서 호퍼의 그림들을 정교하게 영상으로 재현하고 교묘하게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 만든 ‘셜리에 관한 모든 것(원제:Shirley)’(2013) 같은 영화도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구스타프 도이치 감독의 이 영화는 호퍼의 그림들 중 13점을 가져와서 이것을 셜리라는 가상의 배우의 삶에서 일어난 장면들로 설정했다. 이 전시에서는 그 그림들 중 ‘햇빛 속의 여인’을 볼 수 있다.

6 호퍼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 소설집도

에드워드 호퍼 ‘푸른 밤’(1914).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호퍼의 그림들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샘솟을 수 있는지는 단편소설집 『빛 혹은 그림자』(2017)가 증명해 줄 것이다. ‘공포·스릴러 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을 비롯해 호퍼의 팬인 17명의 소설가들이 서로 다른 호퍼 그림 17점에 영감 받아 쓴 단편들을 모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샌틀로퍼의 '밤의 창문'을 바탕으로 한 단편도 여기에 수록되어 있다. 그밖에도 이 단편집에 영감을 준 그림 여러 점이 전시에 포함되어 있는데, 그 중 초기 주요작 ‘푸른 밤’(1914)은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로버트 O. 버틀러가 그림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신비롭고 불길한 이야기로 풀어냈다. 그림에는 푸르스름한 초저녁 카페에 창백하게 분장한 피에로가 앉아 있다. 그 신비스런 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담배를 문 채 군복을 입은 남자, 그리고 베레모를 쓴 남자와 마주 앉아 있다. 불가능하지 않지만 보기 쉽진 않은 장면. 현실의 장면인데도 기묘한 꿈의 한 장면 같다. 그래서 버틀러의 단편도 현실과 심리적 환상의 경계에 묘하게 걸쳐져 있다.

7 호퍼의 그림이 다 현실인 건 아니라고?

에드워드 호퍼 '아침 7시'(1948)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호퍼는 흔히 ‘사실주의 화가’라고 하지만, 종종 현실의 풍경에 상징적인 허구의 풍경을 섞곤 했다. 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 중에는 ‘아침 7시’(1948)와 ‘계단’(1949)이 대표적인 예다. ‘계단’은 호퍼의 고향 집(뉴욕주 소도시 나이액)을 그린 것인데 본래 현관문을 열면 평범한 거리가 펼쳐지지만 이 그림에서 열린 문 너머로 숲을 펼쳐 놓았다고 이승아 연구사는 설명한다. ‘아침 7시’는 호퍼가 고향에서 15년 전에 본, 아마도 금주법 시대에 주류 밀매를 했던 가게를, 기억에 환상을 입혀 그려낸 것이다. 미국의 계관시인 마크 스트랜드는 이 그림에 대해서 “시간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시계가 걸린 깔끔하고 단정한 상점” 즉 “문명”이 “어둡고 어지럽고 불가해한 자연의 모습”인 숲과 상징적으로 병치되어 있다고 말했다.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호퍼는 현대 한국에서도 인기가 있는 것이리라. 광고에 쓰이기 좋은 밝고 명쾌한 색면과 극적인 구도를 지녔지만 휑한 여백과 거기 맺힌 빛의 사각형이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풀리지 않는 동경을 암시한다. 어렵지 않은 사실주의적 풍경이면서도 상징주의적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들은 많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품고 있고 보는 사람마다 각자의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다. 이것이 시공을 초월한 호퍼의 마력이다.

문소영 문화전문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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