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문화] 돌멩이로 남기는 일
나에겐 소중한 기억의 자물쇠
4월, 모두가 아팠던 그 날 기억
슬픔의 돌멩이 꽃으로 남아라
바이칼 호수의 올혼섬에서 떠나올 때의 일이다. 그곳 사람들에 대한 뜨끈한 마음은 차치하더라도 바이칼 호수의 파도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올혼섬의 돌 하나하나를 어찌 다시 만져볼 수 있을까. 여행을 그리 흔하게 다니는 편이 못되니 여행지에서의 떠남은 늘 아쉽고 안타깝고 또 애절하다. 내가 탄 지프차가 미처 타지 못한 일행을 기다리느라 정차해 있을 동안 나는 차창밖에 보이는 작은 돌멩이 하나에 눈이 갔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눈으로 계속 굴렸다. 기억장치에 저 작은 돌멩이를 받쳐두고 싶은 묘한 마음 때문이었다.
나는 가끔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에 아득바득 매달릴 때가 있다. 어떤 강박처럼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것의 허물을 오래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오리과의 조류인 넓적부리도 나와 다를 바 없이 더러 이런 일을 하는 모양이다. 프랑스 현대문학의 거장인 미셸 투르니에는 산문집 ‘외면 일기’에서 자신의 정원에 사는 넓적부리 얘기를 들려준다.
넓적부리 암컷이 그 정원에서 제 아들 하나와 살림을 차렸다. 자연이 앙갚음을 하는지 이 암컷이 새끼를 깔 수 없는 알만 낳았다. 그런데도 암컷은 한사코 알을 품으면서 심지어는 그 알을 깨뜨려서 속엣것을 삼키기까지 했다. 그러더니 그 알껍데기를 연못에 가서 정성스럽게 씻더라는 것이다. 투르니에는 그 장면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에 대한 일종의 희화를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구상하다가 실패한 작품 원고를 버리지 못한 채 끝없이 품고 있는 작가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내가 의미 없는 돌 하나에 내 기억의 자물쇠를 채우려 했듯이 넓적부리에게도 넓적부리만의 어떤 절박한 사연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하찮고 무용한 일이 또 그 누군가에게는 귀하고 숭고한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돌멩이가 피리 불고, 덩실덩실 춤추고, 노래하는 꿈을 꾼다. 오래 깨고 싶지 않아 몸을 더 오므린다. 장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중략/나는 돌멩이를 버리고 싶어서 돌멩이를 꼬옥 쥐고 꿈꾼다.”(정영선 시인의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 부분 인용) 어쩌면 나는 올혼섬에서 각인한 작은 돌멩이에 그즈음까지 살아온 내 삶의 전부를 밀어넣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돌멩이에 장미라는 이름을 붙인 한 시인처럼 간절하고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나의 돌멩이를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봄꽃이 화르르 지고 있는 4월 이즈음엔, 모두가 아팠던 날의 돌멩이를 가슴에서 꺼내 만지작거리게 된다. 시간이 흘러도 단단한 돌 속에 묶여 있는 슬픔,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간절한 기도로 쓰다듬게 되는 기억의 돌멩이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까지도 돌멩이 속에 담아 기억하지만, 돌이 흔하지 않은 콘크리트 세상에서 돌멩이 일기를 쓰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꼭 써야 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돌이켜보면 오염된 물에 돌멩이 하나가 큰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으니까 돌은 할 일이 많다. 돌에게 장미의 이름을 붙여놓고 부탁한다. 잠시 꽃이기도 하는 작은 돌아, 늘 내 옆에 있어라!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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