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와 성폭력의 결합…억압·통치의 수단이 되는 과정[책과 삶]
수치
조애나 버크 지음·송은주 옮김
디플롯 | 560쪽 | 2만7000원
“수치는 대단히 정치적인 감정이다. 효과는 멀리까지 퍼진다. 성폭력이 자신과 공동체에 수치를 줄 것이라는 두려움은 그 어떤 실제 공격보다도 강력하다. 성폭력은 유달리 효과적인 억압의 도구다.”
런던대학교 버크벡칼리지 역사학 교수이자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연구·저술 활동을 하는 조애나 버크가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 강간을 고찰한 책을 냈다. ‘수치’는 강간의 맥락을 관통하는 감정이다. 저자는 “수치는 개인적 특성이라기보다는 역사적 시기, 지리적 장소, 무수히 많은 권력의 제도적 체제에 깊이 뿌리박힌 사회적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절도 피해자가 수치를 느끼는가. 수치는 ‘누가 어떤 짓을 했느냐’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와 관련이 있다. 성폭력과 수치가 긴밀한 이유다. 직접 피해자만이 아닌 공동체도 수치를 느낀다. 행위 발생 때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강간으로 태어난 아이들도 평생 치욕을 당한다. 성폭력과 수치는 억압과 통치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
책은 구술 기록과 통계 등을 종합한 ‘강간의 세계사’다.
성폭력의 의미와 영향을 돌아보고, 성폭력이 계속되게 만든 이념과 사회 제도 등을 호명해 이들에게 수치를 되돌려주려 한다. 수치는 ‘당한’ 쪽이 아니라 ‘가한’ 쪽이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책은 강간을 둘러싼 고정관념에 저항하며 곁을 넓힌다. 어떤 이들은 ‘강간이 죽음보다 나쁘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가, 책은 질문한다. 피해자를 여성, 가해자를 남성에 한정하지 않는다. 동성애 혐오자들이 동성애를 ‘교정’하겠다며 가하는 성폭력과 트랜스젠더를 향한 폭력에도 주목한다. 인종, 민족, 계급, 카스트, 종교, 나이, 신체 유형, 장애 유무 등이 얽히고설킨 교차의 영역에 있는 이들이 더 큰 성폭력의 위험에 놓여 있다는 사실도 강조한다. 저자는 인간 사회에서 강간을 뿌리 뽑을 수 있다고 낙관한다. 참담한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강간 없는 세상을 꿈꿔야 한다고 말한다.
오경민 기자 5k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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