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와 연애를 할지 대충 알 듯…뻔한 이야기에도 일렁이는 맘[이종산의 장르를 읽다]
이별에 보내는 편지
브리지드 캐머러 지음·이은선 옮김
창비 | 456쪽 | 1만6000원
봄은 로맨스의 계절이다. 사방에서 꽃이 피어나 거리가 밝아지고 바람이 부드러워지면 괜히 새로 산 옷을 입고 외출하거나 좋은 사람과 손을 잡고 데이트하고 싶어진다. 새 학기가 한 달 반 정도 지난 지금은 곳곳에서 캠퍼스 로맨스가 피어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사실은 안다. 요즘 젊은이들이 낭만적인 연애에만 푹 빠져 지낼 만큼 한가하지 않다는 걸. 연애보다는 당장 코앞에 닥친 중간고사나 이번 달 식비가 시급한 문제일 거다. 그러나 사랑하고 싶은 마음까지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진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직장인 커뮤니티에는 매일 연애하고 싶다는 글이 올라온다. 어느 학교에서는 어느 반의 학생 둘이 사귀는가 안 사귀는가가 가장 뜨거운 화제라고 한다. 학생들 사이에서 뜨거운 화제일 뿐만 아니라,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그게 가장 큰 화제다(그 학교에서 일하는 친구가 전해준 소식이다).
현실 연애를 하지 않더라도 로맨스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로맨스 영화 보기, 멜로 드라마에 빠지기, 그리고 연애소설 읽기. 최근 서점에 갔다가 예쁜 표지의 책이 눈에 띄어 집어보니 로맨스 소설이었다(서점에서 눈에 띄는 예쁜 표지의 소설은 로맨스일 확률이 높다). 제목은 <이별에 보내는 편지>.
내가 좋아하는 안유진 작가의 일러스트가 표지에 들어가 있고, 뒤표지를 살펴보니 장르는 영어덜트 로맨스다. 이 정도면 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책을 사서 낮에 카페에서도 읽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읽고, 자기 전에 이불 위에서 뒹굴거리며 졸릴 때까지 읽기도 했다. 심심할 때 휴대폰을 보면 알고 싶지 않은 온갖 복잡한 세상사가 머리를 어지럽히지만, 연애소설을 펴면 달콤한 마음이 굴러다닌다. 특히 영어덜트 로맨스의 달달함은 항상 하루치 권장량을 초과한다.
<이별에 보내는 편지>는 어쩌면 뻔해서 더 좋은 연애소설이다. 어두운 남자아이가 있다. 규칙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방황하고, 사나워보이는 남자아이다. 당연히 꽤 진한 마음의 상처도 있다. 여자아이는 모범생이며, 당연히 처음에는 남자아이를 경멸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자주 부딪히고, 서로를 오해하며, 상대방을 보면 화가 나지만 이상하게도 싫지만은 않다. 그러다 문득 어느새 깊어진 마음을 깨닫고 당혹스러워한다. 나…… 너 좋아하니?
이 책은 형식마저도 뻔하다. 두 주인공은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채로 쪽지와 e메일을 주고받는데, 학교에서는 앙숙이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마주치기만 하면 싸우던 아이가 매일 e메일을 주고받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과 속마음을 털어놓는 그 아이라는 걸 모른다. 여자아이는 사랑하는 엄마를 잃은 상처가 있고, 남자아이는 여동생과 아빠를 잃었는데 둘 다 교통사고였다. 작가는 두 사람이 과거에 겪은 일이 서로 관련 있는 일인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꼰다.
클리셰를 비트는 로맨스물도 재밌지만, 클리셰대로 흘러가는 소설을 읽는 것은 편안하다. 독자는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다 안다.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할 때 앞으로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갈지 대충 아는 것처럼. 알아도 상관없다. 정해진 공식대로 투닥거리고 으르렁대다가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서서히 상대방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진다. 그러다 오해가 깊어져 어긋났다가 결국은 좋아하는 마음이 이긴다. 두 주인공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하고 키스한다. <이별에 보내는 편지>는 모범생처럼 공식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어떤 면에서 연애소설을 읽는 것은 공연장에서 클래식 연주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 같은 곡이라면 모두 같은 악보를 연주한다. 중요한 것은 같은 악보를 어떻게 연주하는가다.
책에 실린 저자 소개에 따르면 <이별에 보내는 편지>의 작가 ‘브리지드 케머러’는 열두 편이 넘는 영어덜트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영어덜트 소설에 있어서 능숙한 연주자와 같은 작가인 셈이다. <이별에 보내는 편지>는 노련한 피아니스트의 연주 같아서 읽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아는 대로 흘러가면서 영어덜트 로맨스를 읽는 독자가 기대하는 모든 것을 정해진 타이밍에 선사한다. 두 주인공의 마음은 어둡고, 풋풋하고, 순수하고, 귀엽다. 두 주인공은 과거의 상처에 붙잡혀 있다가 사랑을 통해 회복하고 성장한다. 작가는 주인공 주변의 여러 캐릭터들을 통해 반복해서 말한다. 하루는 하루일 뿐이라고. 나쁜 하루 때문에 일 년을, 남은 모든 시간을 망치지는 말라고. 이것도 뻔한 이야기인가? 하지만 소설은 결국 뻔한 말을 새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오늘을 살라. 사랑하라. 나아가라. 나는 뻔한 이야기가 좋다. 뻔한 이야기 속에서 일렁거리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 좋다. 서사의 긴 역사 속에서 수없이 반복된 사랑과 회복, 성장의 이야기를 읽는 것이 좋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무엇을 통해 성장하고 회복하는가? 연애소설은 그 답을 사랑이라 확신하는 자들의 이야기다.
이종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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