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미래] 괴롭힘에 세뇌된 사회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하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날이 드물 만큼, 치명적 사건이 끝없이 일어난다. 아이들은 폭언과 폭행, 괴롭힘과 따돌림으로 고문당한 끝에 회복하지 못할 상처를 입거나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리곤 한다.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스타 등 성공을 거둔 가해자를 대상으로, 사회 정의를 호소하는 피해자들 폭로도 도무지 그칠 줄 모른다.
캐나다 교사이자 학대 치유 전문가 제니퍼 프레이저의 '괴롭힘은 어떻게 뇌를 망가뜨리는가'(심심 펴냄)에 따르면, 학교폭력은 피해자 뇌에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큰 손상을 남긴다. 고통의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피해자는 불안과 우울, 울화와 불면증에 시달린다. 치솟는 분노와 복수심은 공격 충동과 범죄 행위를 유발하고, 잊히지 않는 굴욕과 좌절감은 약물 중독 등 반사회적 행위의 동기가 된다.
저자는 폭력과 학대를 다루는 현재의 공적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학교나 사회는 흔히 잔혹한 가해 행위로 피해자가 입는 상처를 '가볍게' 처리하려고 한다. 아이가 당하는 괴롭힘과 따돌림을 친구 사이의 사소한 장난으로 치부하고 폭언과 폭행을 어쩌다 벌어진 우발적 사건으로 몰아가곤 한다.
학교폭력을 다룬 수많은 소설은 피해자가 역으로 가해자에게 협박당하는 참혹한 현실을 보여준다. 정순신 전 국가수사본부장 내정자의 아들 사건에서 보듯, 힘 있는 부모를 두면 제도적·법률적 수단을 최대한 악용하는 파렴치도 서슴지 않는다. 피해자 정의의 회복과 상처의 위무보다 사건의 축소와 은폐에 급급한 셈이다. 저자는 이를 '괴롭힘 패러다임' 탓이라고 말한다.
괴롭힘 패러다임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오히려 '잘못은 너한테 있다'라는 메시지를 에둘러 보낸다. 괴롭힘을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성장의 한 부분이거나 내적 성숙에 필요한 시련의 한 형태라면서 피해자가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여 교사 등 어른을 곤란에 빠뜨리는 일을 멈춰야 한다고 압박한다.
괴롭힘 패러다임은 학교뿐 아니라 가정, 군대, 회사 등 사회 전체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이 폭력에 감염되고, 학대에 중독되어 폭언과 폭행이 만연한다. 괴롭힘에 세뇌된 사회는 폭력의 진정한 해결을 방해하고, 피해자를 더 큰 고통에 빠뜨린다. 학교폭력을 근절하려면, 무엇보다 괴롭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피해자의 고통을 인정하고, 가해자에게 정당한 책임을 물리는 정의의 패러다임이 작동할 때, 피해자가 치유를 향한 첫걸음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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