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춘추] 이공계의 난

2023. 4. 21. 17: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고려 건국 이후 문신을 숭상하고 무신을 업신여기는 '숭문억무(崇文抑武)' 정책은 결국 '무신의 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중앙정부의 주요 요직이란 요직은 전부 차지하고 있는 문신들에 비해 무신에 대한 인식이나 대접은 속된 말로 '발톱의 때'만큼도 못했을 것이다.

최근 국내 우수한 이공계 인재들의 심각한 엑소더스 현상이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일명 SKY라 불리는 국내 최고 대학의 이공계 학생들이 타이틀을 버리고 가는 곳이 '의치한약수'라고 한다.

우수한 이공계 학생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재수도 모자라 N수를 각오하고 의약계열로 진로를 바꿨을까?

비교의 대상이나 정도는 다르지만 이공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역시 900년 전 업신여김 받던 무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과학자나 공학도의 꿈을 안고 이공계로 진학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정작 취업은 어렵고 쥐꼬리만 한 수입에 '공돌이' 취급을 받는다면 내 자식부터 말려야 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며 반도체 등 미래 핵심 산업에 대한 이공계 인재 양성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지만 현실적인 기대치는 그리 높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정부가 그럴싸한 정책을 쏟아내더라도 법치국가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결국 관련법 정비가 우선이다.

하지만 입법을 관장하는 국회의 국회의원 가운데 이공계 출신은 손에 꼽을 정도다.

실제 21대 국회 출범 당시 전체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이공계 출신 의원은 29명에 불과했다. 10%도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 중 재선에 성공한 의원은 8명뿐이다. 이공계 출신 의원들은 재선도 쉽지 않은 셈이다.

설령 이들의 노력으로 제대로 된 법이 만들어지더라도 이를 정책으로 현실에 적용해야 할 정부 부처 역시 비이공계 출신들로 가득하다.

심지어 과학기술 정책을 관장하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만 하더라도 반도체 전문가인 장관을 제외하고 1·2차관은 물론 주요 실·국장급 인사 대다수가 인문·사회계열 전공자들로 채워져 있다.

사법부는 말할 것도 없다. 로스쿨 도입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공계 출신 판검사 수는 당초 기대치를 훨씬 밑돌고 있다.

오는 6월 문을 여는 유럽 통합특허법원(UPC)의 경우 전체 85명의 판사 가운데 이공계를 전공한 기술판사가 51명이나 된다. 여기다 변리사의 단독소송대리도 가능하다. 오래전부터 제기돼오던 기술판사와 변리사 소송대리 도입을 이런저런 이유로 꺼리고 있는 우리 사법부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얼마 전 정부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우수 이공계 인재의 의대 '블랙홀' 현상에 대한 대책 마련에 고심하고 있지만 뾰족한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입법·행정·사법 등 국가를 움직이는 핵심 위치에 이공계 전문가가 없다 보니 속시원한 해결책이 나올 리 만무하다.

우리 사회에 고착돼 있는 이공계 기피를 극복하기 위해선 3권의 요소요소에 이공계 인재들의 진출과 약진이 절실하다.

[홍장원 대한변리사회 회장]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