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이런’ 사람이라 단정 짓지 마, 난 그저 나일뿐이니까[이진송의 아니 근데]
지난 13일, OTT 채널 TVING의 오리지널 프로그램 <MBTI vs 사주> 1화가 공개되었다. 방영 전부터 입소문을 타며 흥미를 끌었던 프로그램은 주간 유료가입기여자수 3위를 기록했다. 그만큼 기획이 흥미로운 콘텐츠라는 뜻이다. 온라인상에서는 감동적인 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참가자 집단과, 그런 참가자를 보며 웃는 참가자 집단의 모습이 대조되는 ‘짤’이 퍼지기도 했다. 사주가 꾸준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다면 MBTI는 그야말로 괴물 신인이다. 검사 자체에 대한 신뢰도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MBTI의 인기는 최근 5년 사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MBTI가 사람이었다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압도적인 표 차이로 M통령이 되었을 것이다(제발). MBTI는 요즘 세대의 사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며, 어딜 가든 MBTI를 묻는다. 자신의 MBTI를 모르면 스몰토크가 안 된다.
‘사회 생활의 가면’을 상징하는 종이 봉투를 쓴 채 모인 150명의 참가자, MBTI·사주 전문가들이 이들을 분석
1화에서는 ‘연애’ 테마로 단체 소개팅 진행…‘진정한 나’ 찾는게 아닌 ‘내가 선호하는’ 상대방 탐색하는 등 아쉬움 남아
적당히 즐기면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어떠한 상황에도 유지되는 ‘확고한 형태의 나’는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MBTI는 쉽게 말해 ‘자기 보고형 성격 유형 검사’로, ‘마이어스-브리그스 유형 지표’(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줄임말이다. 작가 캐서린 쿡 브리그스와 딸 이저벨 브리그스 마이어스가 카를 융의 초기 분석심리학 모델을 바탕으로 개발했으며, 사람의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외향·내향, 판단·인식을 의미하는 태도 지표(E와 I, P와 J라는 알파벳이 더 익숙할 것이다)와 감각·직관, 사고·감정(S와 N, T와 F로 표기된다)을 조합한다. 예를 들어, 외향적·판단형·감각적·사고형의 특징을 가진 사람은 ESTP가 되는 식이다. 사주는 한국인에게 익숙한 개념으로, ‘네 팔자도 참 기구하다’가 ‘사주팔자’에서 온 표현이다. 태어난 생년월일과 시간에서 추출된 총 여덟 글자가 네 개의 기둥(연주·월주·일주·시주)을 이룬다. MBTI가 성격검사라면, 사주는 ‘팔자’라는 표현이 의미하듯 성격을 포함하여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조망하는 정보를 제공한다. 결혼 전에 사주단자를 주고받거나 ‘궁합’을 운운하는 문화 역시 사주에서 기인한다. MBTI가 성격을 알파벳의 조합으로 표기한다면, 사주명리의 핵심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이다. 누구는 ‘큰 나무’, 누구는 ‘콸콸 흐르는 물’처럼 속성을 정해줄 때 특유의 동양적 ‘폼’이 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체험으로 인기라고.
<MBTI vs 사주>는 ‘MZ세대’가 MBTI와 사주에 열광하는 이유로 ‘진정한 자기를 찾고 싶어서’라고 분석한다. 프로그램은 실험 다큐 형식으로 진행된다. 150명의 참가자는 사회생활을 위해 썼던 가면을 상징하는 종이봉투를 쓴 채 모인다. MBTI와 사주 전문가들이 진영처럼 나뉘어, 참가자들을 분석한다. 첫 번째 실험에서 음악을 튼 후 참가자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한다. 전문가들은 자기 자신을 잘 표현하는 성향을 근거로, 특정 참가자가 ‘춤을 출 것이다’라고 예측한다. 지목된 사주의 참가자가 음악에 맞춰 가장 먼저 춤을 추기 시작할 때, 아마 많은 시청자가 짜릿함을 느끼며 외쳤을 것이다. “역시 사주는 빅데이터야!” 도박 혹은 예언과 같은 재미를 유발하는 순간이다. 이후 ‘슈퍼E(외향형)’라고 지목된 참가자 역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이때 또 탄식이 터졌을 것이다. “역시 MBTI는 과학이라니까?”(두 대사는 각각 사주와 MBTI를 맹신할 때 쓰는 일종의 ‘밈’이다).
<MBTI vs 사주>의 1화는 ‘MZ세대의 가장 큰 고민’인 연애를 테마로 제시한다. ‘~한 사람을 찾는다면’이라는 전제하에 공감이나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MBTI 유형과 사주 요소를 보여준다. 그리고 MBTI와 사주의 궁합을 보여줄 수 있는 조합으로 각기 두 번의 가면 소개팅을 진행한다. 예고를 보면 2화의 주제는 ‘성공’이었으니, 이런 식으로 각 화는 주제에 맞춰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진행이 프로그램의 신선함을 반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진정한 자기를 찾는다고 해놓고 ‘내가 선호하는’ 상대방을 탐색하는 데다, 소개팅이 잘되고 못되고의 이유를 전문가가 해석할 때 표본집단에 대한 사후적 해석이라는 인상이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면을 쓴 채로 하는 단체 소개팅이 프로그램의 그림상으로는 흥미로울지 몰라도, MBTI와 사주의 신빙성을 보여줄 수 있었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MBTI나 사주의 조합을 확인하려면 가면을 벗고 서로를 확인한 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연애 실험: 블라인드 러브>처럼 상대의 얼굴을 끝까지 모른 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가면 소개팅 이후 ‘원래 취향이 아니었던’ 참가자가 달리 보여 연인이 된 참가자도 있었으나 이런 일은 일상에서도 흔하다.
‘굳이’ 가면&단체 소개팅을 선택할 만큼의 차별점이 보이지 않는 데다, 연애 정상성을 기반으로 이성애자만 고려한 기획이었다. 사주나 성격검사에서 사회의 정상성 기준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느끼는 가장 큰 괴리감은, 언제나 ‘연애나 배우자’ 관련 항목이 이성애 중심이라는 것이다. 연애가 가장 잘 팔리는 소재임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왕 OTT 플랫폼에서 제작한 만큼 좀 더 유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MBTI&사주×연애’를 컬래버하면 어땠을까. MBTI와 사주의 존재감이 흐지부지된 채 갑자기 실제 커플로 만나고 있는 참가자들의 근황을 소개하는 마무리는, 요즘 범람하는 일반인 연애 프로그램과 뭐가 다른지 의아하다. 1화의 참가자들은 연애를 테마로 하는 ‘MBTI와 사주’의 실험이 아니라, MBTI와 사주를 ‘테마’로 잡은 소개팅에 참여한 셈이다.
MBTI와 사주의 공통점은 ‘캐해’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캐해’는 ‘캐릭터 해석’의 줄임말로, 누구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특징과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행동과 말을 할 것이다라고 예측하는 것이다. 현대는 단군 이래 그 어떤 때보다 ‘나’가 중요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필하는 게 중요한 시대다. “내 장점이 뭔 줄 알아? 바로 솔직한 거야.”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아이브가 얼마나 멋져 보이는지!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바로 ‘내가 하는 나의 캐해’다. 왜냐하면 너무 가깝고, 너무 속속들이 24시간 보고 있고, 사람은 원래 입체적이고 다면적인데 그 면모를 한꺼번에 보니까. 평소 내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역시 내가 익숙한 방식대로 굴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자기 보고’ 검사인 MBTI가 피검사자의 ‘희망 사항’을 반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MBTI는 나에 대한 정보를 준다. “당신은 ~한 사람입니다. ~이기 때문이죠.” 이것은 나를 증명하고 방어해야 하는 현실에서 소중한 방패가 된다. MBTI의 유행 이후, 내향적인 사람들은 ‘소심하다’거나 ‘사회성이 없다’는 부정적 평가에 맞서 ‘극I라 그렇다’ ‘내향형의 특징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MBTI의 유행에는 ‘네 모습 그대로도 괜찮다’는 말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사주 역시 불확실성이 강하고, 모든 위험 부담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위로를 건넨다. “모든 인생에는 봄과 겨울이 있어요. 지금은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 같겠지만, 언젠가 봄이 옵니다. 당신의 사주에 ~가 있기 때문인데요. 몇 년 후에는 대운(大運)이 있군요.” 갑자기 시궁창 같은 현실을 견딜 힘이 생긴다. 좋고 나쁜 것은 없다는 사주의 특성상, ‘나’는 누군가에게 ‘귀인’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프로그램의 실험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거라고 예측되었던) ‘금’의 성질을 소유한 사람들은 냉철하고 차갑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이런 ‘금’의 성질은 ‘토’의 성질을 가진 사람에게 아주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MBTI든, 사주든, 인간은 자기를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좋아한다. 한때는 혈액형 성격론이 전국을 제패했다. 재미와 흥미대로 적당히 즐기면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사람의 성격은 스펙트럼이고 모두가 어떤 요소를 다 조금씩 가지고 있으며, 자라온 환경이나 맺었던 관계 등 다양한 요소는 검사나 사주가 반영할 수 없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고유하게 유지되는 단단하고 확고한 형태의 ‘진정한 나’가 있다는 건 환상에 불과하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게 답답하다고 외치지만, 결국 인간은 다양한 관계 속에 있는 존재이다. 나는 ‘~한 사람이다’라고 단정 지을 필요가 없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현실의 나’가 다르다면, ‘현실의 나’가 ‘내가 아닌’ 게 아니라 나에게 있는 어떤 면이 어떤 상황에서 조금 더 부각되는 것뿐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몰랐던 나의 성향은 어딘가에 조용히 묻혀 있다가 계기가 생기면 뽁 솟아오르기도 한다. 왜, 로맨스 현장에서 불멸의 명대사가 있지 않은가. “하…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누군가를 사주나 MBTI로 재단하는 ‘과몰입’만 주의한다면, MBTI나 사주는 나의 인식 바깥에 있는 다양한 타인과 관계, 존재들에 대해 좀 더 상상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시의적절한 기획인 만큼 <MBTI vs 사주>가 좀 더 흥미로운 방향으로 진행되길 바란다.
이진송 계간 ‘홀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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