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원에서도 ‘비건’ 여부 체크…당연한 일상이 된 채식[다른 삶]
30대가 될 때까지 나에게 한 끼의 식사란 배고픔을 잊게 해주는 든든한 포만감이었다. 그리고 그 포만감에 어떤 식으로든 고기가 있었다. 아무리 이것저것 곁들일지라도 샐러드나 고기가 포함돼 있지 않은 메뉴는 나에게 한 끼의 식사가 될 수 없었다.
혼자 살며 대부분의 끼니를 집에서 해결할 때에도 큰 변화는 없었다. 주말에는 고기를 구워 먹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맨날 먹는 게 거기서 거기였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항상 나에게 익숙한 재료를 특별한 가격으로 섭취했다.
비건.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채식주의 생활방식의 하나로, 동물성 식품을 제한하고 과일·채소·곡물 등 식물성 식품을 섭취하는 식습관을 지향하는 생활양식’이다.
지난 몇년간 유행처럼 번졌지만 ‘육식’을 즐긴 내게 ‘채식’은 그저 점심시간에 여느 식당에서 잠깐씩 마주하는 ‘특별한 방식의 메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 채식주의를 접했을 때도 그랬다. 바르셀로나에서 단체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누군가가 채식 메뉴에 대해 종업원에게 물었다. 당시 비건의 사전적 정의를 알게 된 내 반응은 “그렇게 먹으면 나중에 배고프지 않아?”였다.
견고했던 생각이 달라진 건 선입견이 깨지면서부터다. 베를린 거리에서 마주친 채식 메뉴는 그 종류나 방식이 아주 다양했다. 채식 재료의 본질을 끝까지 담은 메뉴, 채식 버거처럼 고기의 식감을 재현하려는 메뉴, 고기만 빠졌을 뿐 열량으로 보나 양으로 보나 여느 고기 메뉴와 비등한 메뉴 등 끝이 없었다.
아무 식당 들어가도 ‘비건 옵션’…“눈치 보지 않고 먹을 수 있어 좋다”
‘육식’만을 ‘정상’으로 표기한 적도 있어, 처음부터 당연했던 문화 아냐
중동식 콩 요리 ‘팔라펠’ 인기 메뉴…녹두전·감자전 등 일상에도 많아
과거엔 몰랐던 샐러드 한 끼의 기쁨, 육아처럼 새로운 세상 찾은 느낌
지금은 한국에서도 채식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들이 갈 만한 식당이 많이 없던 시절 ‘베를린에서는 어렵지 않게, 눈치 보지 않고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좋다’고 하던 지인의 말이 기억난다. 하물며 빵에 소시지를 넣어 먹는 이케아의 핫도그에서도 ‘비건 소시지’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문화가 순조롭게 정착된 것은 아니다. 오래전 회사에서 식사 메뉴를 표기하는 방식 때문에 시끌시끌했던 적이 있다. 담당자가 채식 유형을 확인하기 위해 ‘채식’ ‘생선은 가능’ ‘정상’이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고기를 섭취하는 것을 ‘정상’이라 규정한 것에 대해 일부 동료가 정정을 요구했고 그다음 해에는 ‘고기’ ‘생선’ ‘둘 다 불가능’으로 정정됐다.
이런 서툰 과정이 반복되며 이제는 부드럽게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실제로 베를린에서는 작정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은 특별한 음식점뿐 아니라 일반 음식점에서도 동일한 메뉴에 비건 옵션이 있다. 채식주의자 친구와의 만남을 위해 특별한 곳을 찾고 예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게 뭐 대단한가 싶겠지만, 그만큼 다양한 삶의 방식을 존중한다는 뜻인 만큼 의미가 크다.
비건을 위한 음료 가게, 비건을 위한 아시아 음식, 비건을 위한 마트 등 거리에서 만나는 ‘채식’의 모습은 흥미롭다. 어딘가 익숙하기도 하고, 어딘가 새롭고 신비하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한국 음식 중 녹두전이나 감자전도 채식 메뉴다. 한국에서 지냈던 그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왜 이 음식들을 채식 메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까.
베를린에서 즐겨 먹는 채식 메뉴 중 중동 지역에서 온 ‘팔라펠’이라는 먹거리가 있다. 콩을 잘게 다져서 고수나 양파 등을 섞어 동그랗게 튀겨낸 음식이다. 샌드위치처럼 빵에 넣어서 먹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샐러드와 한 접시에 담아 요리처럼 먹기도 한다. 겉으로 보면 튀긴 완자처럼 생겼다. 갓 튀겨내 고소함이 일품이다. 아내의 어학원에는 ‘팔라펠의 장인’이라고 불리는 시리아 출신 여성이 있다. 아이 5명을 둔 그녀가 만드는 팔라펠에는 고기 한 점 안 들었지만, 고기 맛이 난다고 한다.
양젖이나 염소젖으로 만드는 ‘할루미’란 치즈도 채식의 아쉬움을 없애주는 음식이다. 생으로 먹어도 누린내가 전혀 없고, 식감이 단단한 편이라 기름에 튀기거나 그릴에 구워 먹는다. 다른 요리에 곁들이기도 좋다.
나와 다르게 아내는 원래 채식을 즐겼다. 미혼일 때부터 그랬다고 했다. 덕분에 결혼 후 언젠가부터 집 밖에서나 보던 채식 메뉴가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껏 알던 세상과 다른 세상을 마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육아처럼 말이다.
아이의 유치원에서도 종종 채식 여부와 관련된 질문을 한다. 이곳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질문이지만 이런 문화를 모른 채 자란 엄마와 아빠는 그저 생경하기만 하다.
이곳의 선생님들은 알레르기에 대해서도 민감한 편이다. 아이가 어린이집을 다니던 3세 즈음, 간식으로 빵을 구워서 보냈다. 당시 어린이집에는 빵에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꼼꼼하게 적은 메모를 함께 보내야 했다. 이 아이들이 성장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더 섬세하고 다채로워지겠지.
한 끼의 식사를 생각하면 각자 떠올리는 양과 방식이 있다. 가벼운 샐러드의 경우 누군가에겐 한 끼의 식사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그저 애피타이저가 되기도 한다. 수프도 마찬가지다. 따뜻한 수프에 빵 몇 조각을 찍어 먹는 것도 훌륭한 식사이고, 어떤 이에겐 거대한 식사의 서막을 알리는 시작일 뿐이다.
최근 나는 올리브유와 소금, 후추만을 뿌린 샐러드를 먹는 것이 한 끼 식사로 부족하지 않고 심지어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수많은 메뉴는 어떤 기쁨을 또 안길까.
▶신혜광·이은혜
현재 베를린에 거주 중인 3인 가족이다. 닭띠 아빠는 건축설계사무실에 다니고, 돼지띠 엄마는 그림을 그리고, 돼지띠 아이는 어린이집에 다닌다. 단독주택에 사는 것, 자동차로 베를린에서 나폴리까지 여행하는 것이 꿈이다. <스페인, 버틸 수밖에 없었다>와 <어느 멋진 일주일, 안달루시아>를 쓰고 그렸다.
신혜광·이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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