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역사문화 리포트] 7.울릉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
■가장 사랑받는 섬, ‘우리땅 독도’
-독도에 관한한 남·북한이 한 목소리
-연간 30만명 이상 울릉도 입도
가장 작은 섬이면서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섬은 어디일까. 답은 ‘우리 땅 독도’이다.
독도에 관한 한 남·북한이 따로 없다. 연일 미사일을 쏘아 올리며 한반도에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는 북한도 독도에 대해서는 언제나 한 목소리다.
지난달 일본 문부과학성 검정을 통과한 초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고유영토’라고 표기한 사실이 전해지자, 북한 외무성은 “새 세대에게 그릇된 역사관을 심어주는 부당하면서 왜곡된 표기”라며 “영토 팽창 야망이 깔려있다”고 맹비난했다.
동해상 먼바다 위에 2개의 바위섬으로 이뤄진 독도. 전체면적이 18만7554㎡에 불과하지만, 독도는 한민족 모두에게 그렇게 각별한 존재이다.
매일 반복되는 TV 뉴스에서도 울릉도, 독도의 날씨 안내는 빠지지 않고, 일본이 독도나 동해와 관련해 망언이나 도발을 해 오면 다음 날 우리 신문과 방송에는 국민 반응과 대응책 등이 헤드라인 뉴스가 되는 게 다반사다.
혹자는 “일본이 분쟁화 시도를 하지 않았다면 과연 독도가 지금처럼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일본의 분쟁화 도발이 독도에 대한 국민적 애정을 더욱 촉발한 것이기에 한편으로 씁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기에 앞서 지금 지도를 펴놓고 울릉도와 독도가 자리 잡고 있는 위치를 다시 눈여겨본다면 울릉도, 독도가 얼마나 중요한 곳이지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섬을 가지고 있는 ‘다도국(多島國)’이다. 해양수산부 자료를 기준으로 무인도 2876개와 유인도 472개를 합해 모두 3348개의 섬이 있다. 인도네시아, 필리핀, 일본 다음으로,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은 섬을 가진 나라이다. 그렇게 섬이 많지만 동해바다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섬은 울릉도와 독도 두 개뿐이다. 두 섬이 우리 땅인 것으로 인해서 얼마나 넓은 면적의 해양 강역이 한민족의 자원 영역이 되는지, 생각해 보면 눈물 나도록 고마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코로나19 팬데믹 직전의 통계에 따르면 2019년 울릉도 관광객은 38만6501명, 독도 관광객은 25만8181명에 달했다. 해마다 수십만 관광객이 3시간 내외 뱃길 항해의 수고를 감내하면서 울릉도, 독도를 찾고 있으니 두 섬의 존재에 대한 국민들의 성원 열기도 고마울 뿐이다.
■울릉도에 사람 거주, 청동기 말기로 거슬러 올라가
-고고학 및 문헌 자료에서 기원전 3세기부터 확인 가능
-울릉도에 고인돌과 무문토기 유물 등 존재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동쪽 섬’은 ‘울릉도’
그럼 독도와 짝을 이루는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지금은 강릉·동해 등지에서 여객선을 타고 2시간 40여 분이면 발을 내 디딜 수 있는 섬이지만, 동력선이 등장하기 전, 불과 백 년전 만 해도 울릉도는 그렇게 쉽게 갈 수 있는 섬이 아니었다.
역사를 살펴보면 울릉도로 가려다, 또는 다녀오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렇게 목숨을 건 항해를 각오해야 하는 울릉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고학의 궤적으로 살펴볼 때 기원전 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분석이 많다.
김윤곤 영남대 명예교수와 이병휴 경북대 명예교수는 지난 2003년에 각각 발표한 논문에서 서울대박물관과 영남대 민족문화연구소 등의 ‘울릉도-고고학적 조사연구’와 ‘울릉도·독도의 종합적 연구’ 등의 자료를 토대로 “울릉도의 현포리, 남서리, 저동리 등에서 발견된 고인돌과 무문토기 등의 유물은 최근의 조사 보고서에서 본토(한반도)의 철기시대 전기 말경(B.C 300년경), 즉 기원전 4∼3세기, 아무리 늦어도 서력기원 전후의 전형적인 무문토기이며 청동기시대 유물로 볼 수 있다는 고고학적 연구 성과가 나왔다”고 밝혔다. 청동기 시대 말기에 이미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고고학적 유물이 말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2000년도 더 지난 까마득한 옛날에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본토, 즉 이 땅의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바다를 건너는 항해를 통해 이 섬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증좌다.
울릉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냐고 물음표를 던질 때 자주 인용되는 기록이 또 하나 있다. 이것은 고고학적 증좌가 아니라 역사 기록이니까 조금 더 색다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 魏志 東夷傳) 옥저조(沃沮條)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등장한다.
‘盡其東界 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耆老言 國人嘗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島 上有人 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중략) 其域皆在 沃沮東 大海中’ (동쪽 경계(남옥저)에 이르러, 노인을 만나 “바다 동쪽에는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가”라고 물었다. 노인이 말하길 “나라 사람이 언젠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다가 바람을 만나 수십 일 동안 표류하다 동쪽 어느 섬에 이르렀는데, 섬에 사는 사람과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들 풍속에 해마다 7월에 어린 여자를 가려 뽑아서 깊은 바다에 바친다”고 했다. (중략) 이 지역은 모두 옥저 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이 기록은 서기 244년∼245년 (고구려 동천왕 18년∼19년)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였던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 큰 위기에 빠뜨렸을 때 남옥저로 피신한 동천왕을 추격한 현도군 태수 왕기가 남옥저에서 동천왕의 소재를 찾기 위해 그 지역의 노인 등을 상대로 조사를 하면서 나온 기록이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노인이 말한 ‘동쪽 섬’이 과연 어디냐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이병도 박사는 1950년대에 나온 한국사 고대 편(진단학회)에서 “우산국이 틀림없는 것 같다”고 했고, 일본인 역사학자 이케우치 히로시도 “울릉도에 관한 최고(最古)의 문헌 기록으로 보인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신라 장군 이사부(異斯夫)가 지증왕 13년, 서기 512년에 우산국을 정벌하기 훨씬 이전에 이미 울릉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울릉도에서 발굴·출토되는 고고학적 성과나 삼국지 등의 역사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지증왕 13년(512년)조 기록에는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기사를 전하면서 ‘우산인들을 위력으로 복종시키기 어려워…’라는 표현을 써 우산국이 신라의 막강한 무력으로도 쉽게 굴복시키지 못할 만큼의 상당한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울릉도는 가장 가까운 울진군 죽변항에서 130.3km, 삼척시 원덕읍 임원항에서는 137km이고, 임원항 주변 소공대(召公臺)에서는 맑은 날 육안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소공대는 많은 옛 선인들이 울릉도를 조망하면서 시(詩)를 읊은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울릉도를 바라보며 수많은 문인들이 시를 읊었던 동해안. 2000여 년 전 울릉도에 첫발을 디딘 도해인(渡海人)들은 아마도 맑은 날 육안으로 울릉도를 바라볼 수 있었던 강원도와 경북 동해안의 주민들이 아니었을까.
*참고= 기사에 인용(참고)된 논문과 책의 저자는 논문 발표와 책 발간 당시의 근무처와 직책을 준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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