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의 지옥에서 만난 유일한 ‘내 편’[책과 삶]
“상처 입는다는게 뭔지 잘 알아”
똑같은 고통 속에 사는 아이와
함께 걱정하고 두려움을 나눈다
간절한 의지가 담겨 더 아픈
피해자와 피해자의 대화
헤븐
가와카미 미에코 지음·이지수 옮김 | 책세상 | 296쪽 | 1만4800원
‘우리는 한편이야.’ 1999년 4월이 끝나가는 어느 날 ‘나’는 필통에서 쪽지를 발견한다. ‘어제 비 왔을 때 뭐 했어?’ ‘가보고 싶은 나라는 어디야?’라고 적은 짧은 문장의 편지가 이어 왔다. 5월이 되자마자 도착한 편지엔 ‘만나고 싶어. 학교 마치고 5시에서 7시까지 여기서 기다릴게’라고 적혔다. ‘여기’는 벤치와 콘크리트로 만든 고래를 둔 작은 공터였다. 같은 반 여학생 고지마가 타이어에 앉아 있었다.
첫 편지를 받았을 때 나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기도 했다. 편지가 ‘니노미야’ 패거리가 놓은 덫일지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불안은 사라졌다. 고지마를 보면서 공통점이 떠올랐다. 둘 다 따돌림과 폭력을 당했다.
초등학교 동창인 니노미야는 운동을 가장 잘했고 머리도 좋았다. 누가 봐도 잘생겼다. 내겐 웃으며 “어서 와”라고 말한 뒤 때리고, 괴롭혔다. 내가 ‘사시’라는 이유로 말이다. 패거리는 늘 ‘사팔뜨기’라고 불렀다. 리코더로 때리고, 강제로 운동장을 달리게 만들었다. 고지마는 집이 가난하고 더럽다는 이유로 따돌림을 당했다. 아이들은 ‘음식물 쓰레기’라고 불렀다. 자기들 쓰레기를 버리라고 시켰다.
고지마는 “친구가 됐으면 해”라고 말했다. 그 뒤 계속 편지를 주고받았다. 샤프와 연필, 날씨부터 독서와 세계의 종말까지 편지 주제는 넓어지고 깊어졌다. 내용도 길어졌다. 편지 속 고지마는 밝고 생기가 넘쳤다. 친해졌지만 패거리들이 괴롭힐까봐 고지마를 학교에서 만나지는 않았다.
폭력의 강도는 세졌다. 어느 날 방과 후 패거리는 내 코에 분필을 넣고 칠판에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 뒤엔 먹어야 했다. 변기 물, 금붕어, 토끼우리 채소 찌꺼기 같은 것을 먹은 적은 있지만 분필은 처음이었다.
고지마의 고통도 이어졌다. 교실 청소도구함에 감금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고지마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만, 괴롭기만 할 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내가 그 장면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고지마는 몰랐으면 하는 마음에, 항상 그쪽으로부터 눈을 돌리며 안 보는 척을 계속할 뿐이었다.” 나는 고지마가 오늘은 무사히 집에 갔을까를 늘 걱정한다.
편지 교환은 유일한 즐거움이 되어갔다. 기말고사 전 편지에서 고지마는 시험이 끝나고 ‘헤븐’에 가자고 제안한다. 찾아간 헤븐은 미술관, 정확히는 미술관 속 그림이다. ‘헤븐’이란 제목의 그림은 없다. 고지마가 어느 그림에 붙인 이름이다. 연인들이 방에서 케이크를 먹는 모습을 담았다. 연인들이 목을 마음대로 자유롭게 쑥 늘릴 수 있어서 언제 어디서든 서로 딱 붙을 수 있는 이 방은 고지마의 상상과 바람의 ‘헤븐’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방학이 시작됐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니노미야 일당이 내 존재를 기억에서 까맣게 지워버리기만 바란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 죽임을 당할지 같은 두려움에도 휩싸인다. “나는 왜 두려울까. 상처 입는 게 두려운 걸까? 만약 내가 그걸 두려워한다면, 공포스럽다면, 왜 나는 그것을 내 힘으로 바꾸지 못할까? 애초에 상처 입는다는 건 뭘까. 괴롭힘당하고 얻어맞는데도 왜 나는 당하는 대로 복종하기만 할까. 복종이란 뭘까.”
방학이 끝나고도 놀림과 괴롭힘은 여전했다. 폭력은 더 잔혹해졌다. 니노미야 일당은 나를 체육관으로 데리고 가 ‘인간 축구’를 했다. 내 얼굴에 배구공 가죽을 씌운 뒤 발로 걷어찼다.
병원 치료를 받다가 의사에게서 ‘1만5000엔’이면 사시 교정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어렸을 때 하곤 효과가 없어 신경도 쓰지 않던 수술이었다. 고지마에게 수술을 하면 사시를 고치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면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고지마가 나에게 한편이라고 말한 이유, 고지마가 부스스한 머리를 고수하고 몸 냄새도 지우지 않는 이유도 알게 된다. 사이가 멀어진 어느 날 우연히 고지마를 공원에서 만나게 된다. 니노미야 일당에게도 목격된다.
가와카미 미에코의 이 소설은 열네 살 중학교 남학생인 ‘나’와 여학생 고지마 간, 즉 피해자와 피해자가 나누는 대사로 학교폭력 폐해를 이야기한다. 드라마 <더 글로리>가 인기를 끌고, 정순신 자녀 학교폭력 문제가 이슈가 된 상황에서 피해자에 대한 공감을 끌어낼 대목이 많다.
“우리가 이대로, 누구에게 무슨 짓을 당하든 아무에게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지금처럼 쭉 이야기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다면 언젠가는 진짜 물건이 될 수 있을까?” “넌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진짜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상처 입기만 했으니까 사람이 상처 입는다는 게 뭔지 정말 잘 알거든.”(고지마)
“우리가 이렇게 갈 곳도 없이 하나의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눈물이었다. 여기 말고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세상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 대한 눈물이었다.”(나)
책은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심에 올랐다. 영어 번역 뒤에 많은 리뷰가 올랐다. 죽음, 의지에 관한 철학적 내용을 담았다는 평도 나왔다. 한 리뷰는 고지마의 ‘의지’에 관한 대사 등을 니체 철학에 빗대기도 했다. 예컨대 고지마는 따돌림과 괴롭힘, 폭력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중요한 건 이런 괴로움과 슬픔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는 거지.” “고통과 슬픔은 극복해낼 의미가 있으니까.” “그걸 견딘 후에는, 분명 언젠가 그걸 견디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장소나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열네 살 중학생 입에서 나온 시련, 의지와 극복에 관한 말이 학술적이고 정교한 철학이긴 힘들다. 조숙하지만 어설픈, 또 궤변 같기도 한 대사에서 분명하게 확인하는 건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끊임없는, 떨쳐낼 수 없는 정신적 고통이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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