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파니 찢어지고 3분 후…팀파니스트가 공연을 찢었다”
“부단한 교육과 훈련, 불완전함 받아들이는 자세가 특별한 순간 만들어”
(시사저널=오종탁 기자)
"둥둥둥둥둥둥 둥둥 툭!"
풀 오케스트라 공연 도중 팀파니 울림판 가죽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쫙 찢어진다. 팀파니 연주자는 딱 한 명뿐이다. 더군다나 오케스트라는 지금 팀파니가 가장 부각되는 곡을 연주하고 있다. 망가진 팀파니 앞에 선 팀파니스트에게 위로나 자비란 없다. 지휘자와 다른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비상(非常)'을 알아차리지만, 도울 방도가 있을 리 만무하다. 섬뜩한 공기를 느낀 관객들도 술렁인다.
팀파니스트의 악몽 속에나 등장할 법한 일이 최근 실제로 일어났다. 2월23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KBS교향악단 제787회 정기연주회 현장이었다. 러시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1905년 1월9일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어 쓴 교향곡 11번, 그중에서도 가장 격정적인 2악장이 연주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평화 시위에 나섰다가 제정 러시아 군경으로부터 학살되는 광경을 그린 악장이다. 무자비한 총격으로 인한 충격과 공포를 음악으로 표현하는 데 핵심이 팀파니였다.
'일촉즉발' 상황에서 음 맞춰가며 대처
클라이맥스에 다다랐을 때 거친 연타음을 내던 팀파니 4대(한 세트) 중 1대가 돌연 찢어졌다. 처참하게 찢긴 팀파니 울림판 가죽을 확인한 팀파니스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곧바로 학살 후 정적을 묘사하는 연주가 팀파니스트 주위에 깔리며 처연함을 더했다. 악장 사이 쉬지 않는 곡 특성상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연주를 중단하든지, 아니면 이어가든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팀파니스트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잘 훈련된 파일럿이 추락 직전의 비행기를 구해내듯 놀라운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못 쓰게 된 팀파니 1대를 빼고 나머지 3대로 음을 최대한 맞춰가면서 공연을 마무리한 것이다. 지휘자와 동료 단원, 관객 등 모두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선사했다.
더 큰 기적은 공연이 끝난 후 나타났다. KBS교향악단에서 당시 상황을 재미있게 편집해 3월15일 유튜브에 공개한 영상이 342만 회(4월21일 기준) 넘게 재생되고, 조회 수 증가세도 꺾이기는커녕 더욱 가팔라지고 있다. 1시간여 분량의 전체 오케스트라 연주 영상(16만 회)과 관련 뉴스 영상(KBS 뉴스 채널 공개·103만 회)의 인기도 클래식계에선 이례적인 일이다. 클래식 전공자와 비전공자를 막론하고 수많은 영상 시청자가 댓글로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내고 있다.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다는 반응도 상당하다. 두 달 전 공연에서의 한 단면이 반짝 해프닝에 그치지 않고 계속 퍼져 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묵직한 울림의 진원지인 이원석 KBS교향악단 수석 팀파니스트(29)를 4월18일 서울 여의도 KBS에서 직접 만나봤다.
팀파니가 찢어지기 직전 상황이 궁금하다.
"(피의 일요일 사건 속) 유혈진압을 팀파니로 표현해야 했기에 곡을 통틀어 가장 크고 강하게 쳤다. 특히 '얼마나 무시무시하게 칠 것인지'에 주안점을 뒀다. 팀파니 울림판을 주시하면서 연주하기도 했다. (채로 울림판의 정확한 지점을 때려) 원하는 소리를 꼭 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악기를 지켜보고 있어서 찢어지는 모습도 실시간으로 확인했겠다.
"채로 치는 순간 울림판이 쩍 갈라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마음이었다."
찢어진 원인은 뭐라고 보나.
"팀파니 울림판의 재질인 송아지 가죽은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다. 그래서 온·습도계는 물론 스펀지와 댐핏 같은 습도 관리 기구도 항상 들고 다니며 관리한다. 공연 날은 습도가 20% 아래로 뚝 떨어져 아주 건조했다. 할 수 있는 조치를 다 했음에도 찢어지는 사고를 피할 수 없었다. 게다가 연주곡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1번이다. 기본적으로 팀파니를 강하게 쳐야 하는 곡인데, 마에스트로의 해석이 가미돼 더욱 격렬해졌다."
이번 공연의 지휘를 맡은 이스라엘 출신 거장 엘리아후 인발(87)은 세계 클래식 음악계에서 엄격한 지휘자로 유명하다. 악보에 적힌 하나의 음도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팀파니가 찢어지자마자 인발은 고개를 푹 숙였다. 사고를 알아차린 게 아니라 지휘에 푹 빠져서 나온 동작이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들고 유려하게 지휘를 이어갔다.
반면 이원석 수석 팀파니스트는 일촉즉발 위기에 봉착했다. 근처에 있던 동료들 등골도 서늘해졌다. 눈썰미 좋은 몇몇 관객은 팀파니 사고를 알아차리고 작은 소리로 "어떡해"를 연발했다. 다음 팀파니 연주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3분 남짓이었다.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이 수석은 "뇌가 정지된 상태였다가 '이 공연을 어떻게든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대처 방안을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제일 먼저 바로 옆의 스네어 드럼 연주자를 쳐다보며 간절히 '도와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선 연주자 기준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던 망가진 팀파니는 뒤로 뺐다. 이후 맨 왼쪽 팀파니를 오른쪽으로 옮겨 공백을 없앴다. 1초가 1년 같았다.
교육과 즉흥 연주로 단련
전체 오케스트라 연주 영상에는 사고가 발생하고 2분14초 후부터 동료와 함께 낑낑대며 팀파니를 옮기는 이 수석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로부터 불과 30여 초 후 이 수석은 팀파니 솔로 파트를 멋지게 완수한다. 3분여 만에 기적적으로 위기를 탈출하자 동료 단원들도 관객들도, 상황을 알게 된 지휘자도 간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안심하기엔 일렀다. 연주가 끝나기까지 20분 넘게 남아있었다. 이 수석은 팀파니 4대 버전의 곡을 3대로 온전히 소화했다. 그 와중에 남은 3대의 음정과 음색이 변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세밀하게 조율하는 침착함도 잃지 않았다.
팀파니 4대로 연주해야 하는 곡을 3대로 막아보겠다고 결심했다.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가장 낮거나 높은 음이었으면 커버가 어려웠을 텐데 두 번째 저음을 내는 팀파니가 망가져 불행 중 다행이었다. 첼로 같은 4현 악기로 따지면 G선 하나가 끊어진 셈이다. (1대가 없어지면서) 비게 되는 음을 지나칠 수 없으니, 다른 3대를 활용해 그때그때 판단해 연주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팀파니는 음정이 있는 악기다. 연주하는 곡마다 거기에 어울리는 화음이 있다. 작곡가가 의도적으로 화음을 쓸 때(화성음)가 있고, 화음에 들어가지 않는 음으로 곡에 더 효과를 줄 때(비화성음)가 있다. 4대 버전인 악보를 3대로 소화하기 위해 화성음이면 그 화성 안의 다른 화성음을, 비화성음이면 다른 비화성음을 머릿속에서 생각해 치는 식이다."
그렇게 연주를 무사히 마쳤다. 완성도는 어느 정도였나.
"같은 음역에서 음을 골라내가며 1대의 빈자리를 메웠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고 말할 순 없다. 다만 마에스트로는 나중에 공연에 대해 피드백을 해주면서 '연주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했다. 아울러 전화위복이랄까, 4대로 연주했을 때보다 더 나은 점이 있기도 했다."
더 나았던 점이 뭔가.
"곡에서 마지막으로 친 음정이 '솔'이었다.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원래 맨 왼쪽 팀파니로 내야 하는 음이다. 이 팀파니가 망가진 1대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오른쪽으로 끌어당겨진 상태였다. 그 결과 연주를 마무리할 때 내 시선이 자연스레 지휘자를 향하게 됐다. (리허설 때처럼) 곁눈질로 지휘자를 보는 것과 소통, 감정 교류, 에너지 등 측면에서 확연히 달랐다. 지휘자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우리가 굉장히 특별한 순간을 함께하고 있다'는 느낌을 공유한 것 같다."
연주가 끝나고 마에스트로 인발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지휘 동작과 관계없이 유일무이한 공연을 마친 데 대한 소회가 묻어나는 반응이었다. 세계적 거장이 어깨까지 들썩이며 천진하게 웃음 지었다. 고개를 든 인발은 이 수석을 기립시켜 공연장에 있는 모든 이와 함께 박수를 보냈다. 이 수석은 "박수를 받으며 안도감과 성취감 등 복합적인 감정에 휩싸였다"고 회상했다.
이처럼 특별한 느낌은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됐다. 어느 공연 때보다 뜨거운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20일 후 유튜브 영상이 공개되자 대중도 마치 현장에 있었던 관객들처럼 생생한 관람평을 쏟아내고 있다. 무엇보다 10대부터 30대까지의 젊은 층이 클래식을 통한 색다른 경험에 열광하는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이원석 수석도 공연장 안팎에서 자신감과 자유로움, 철학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20대 청년이다.
만약 다시 이런 상황이 온대도 똑같이 의연하게 대처할 듯하다. '멘붕'에 굴하지 않는 '깡'은 어디서 오나.
"많은 교육과 훈련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팀파니로 치는 한 음 한 음에 이제껏 배운 것과 경험한 것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늘 연주하면서 그런 부분을 기억해 냈고 온전히 체화할 수 있도록 반추해 왔다."
그동안 받은 교육과 훈련을 소개한다면.
"9세 때부터 퍼커션 독주자로서 많은 교육을 받았고, 즉흥 연주를 많이 해왔다. 팀파니의 경우 대학(미국 커티스음악원)에 진학해 트레이닝을 받으며 나의 재능과 자질, 직업 팀파니스트로서의 가능성 등에 눈을 뜨게 됐다. 그 전에는 내가 팀파니스트가 될 수 있을지 몰랐다. 정리하자면 내 정체성은 오케스트라에서는 팀파니, 퍼커션 독주 작업에선 즉흥 연주다. 두 정체성이 합쳐지며 (이번 팀파니 사고 대처와 같이) 오케스트라 교육만 받은 팀파니스트 혹은 솔로이스트로만 키워진 즉흥 연주가와는 조금 다른 대응이 가능하게 된 점도 있다고 본다."
오케스트라 팀파니스트로의 인생 항로도 계획대로 펼쳐진 게 아니라니 흥미롭다.
"더 들어가 보면 오케스트라에서 팀파니 연주 자체도 계획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팀파니는 반주 악기다. 다른 악기가 어떻게 연주되는지에 반응하는 한편 연주가 전반적으로 잘 이뤄질 수 있도록 기반을 만들어줘야 한다. 보통 오케스트라 공연 때 팀파니 연주가 없는 구간 동안 다른 악기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듣는다. 이어 그 순간에 맞게 팀파니를 치면 계획과 완전히 다른 연주가 나올 때도 있다. 공연마다 설레고, 또 특별하게 연주하려 노력하게 되는 이유다."
"불완전함이 완벽의 첫걸음"
문득 대중이 이 수석의 팀파니 사고 대처에 열광한 진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좀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살이에서 '원래 뜻대로 되는 건 없다. 오히려 그게 더 낫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것만큼 큰 위로가 어디 있겠는가. 이 수석은 "예술인으로서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완벽주의의 첫걸음'이란 말을 좋아한다. '불완전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면 완벽에 대한 판단 범위가 넓어진다"며 "어찌 보면 완벽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기에 완벽주의를 지향할 필요도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통상적인 완벽과는 거리가 먼) 오케스트라 공연 중 사고와 대처, 마에스트로와의 소통, 공연장 분위기 등 의외의 순간순간이 모여 특별한 예술을 만들었다"면서 "음악가는 그런 시간의 예술에 항상 몰입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거침없이 얘기하던 이 수석이 갑자기 "내가 너무 쓸데없이 진지한가?"라면서 크게 웃었다. 어느덧 그와의 대화 또한 뻔한 인터뷰 사전 질문지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와 있었다.
■ 이원석 수석 팀파니스트는
△1994년 출생 △예원학교 졸업 △서울예고 1학년 재학 중 도미 △미국 커티스음악원 학사 △미국 템플대 석사(펠로십 전액장학생)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주최 알버트 그린필드 콩쿠르 시니어 부문 1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협연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 연주 △서울시립교향악단 객원 수석 역임 △현재 KBS교향악단 수석 팀파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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