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돈을 눈먼돈 취급하는 사람들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
나랏돈은 정말 눈먼돈인가
공공의 황당한 나랏돈쓰기
예타마저 흔드는 금배지들
레이건 시절 PPSSCC의 함의
英 의무경쟁입찰제도의 교훈
# 한은페이. 한국은행이 나랏돈 수억원을 투입해 2020년에 출시한 모바일현금카드앱이다. 명칭은 그럴듯하지만, 성적은 '초라함'을 넘어선다. 출시 3년차에 접어들었는데도, 이 페이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앱 다운로드 수는 측정하지 못할 정도로 적다.
# 나랏돈을 쌈짓돈처럼 사용해 만들어낸 공공앱은 이뿐만이 아니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폐기되거나 폐기 권고를 받은 공공앱은 635개에 이른다. 여기에 들어간 나랏돈은 놀랍게도 190억원에 육박한다. 적지 않은 혈세가 공공앱 개발이란 미명 아래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얘기다.
# 우리는 기획물 '視리즈'를 통해 나랏돈을 눈먼돈 취급하는 공공부문의 실태를 고발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해법은 과연 없을까. '나랏돈이 쌈짓돈' 視리즈 마지막 편 데스크와 현장의 관점이다.
# 레이건과 스타워즈
1983년 3월 23일.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방송 카메라 앞에 섰다. 전국에 방영할 'TV 연설'을 위한 자리였다. 레이건은 단호한 목소리로 연설문을 읽어내려갔다. "소련의 핵무기를 쓸모없게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국방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할 것이다."
레이건은 여기에 '전략방위체계(SDI·Strategic Defense Initiative)'란 이름을 붙였다. 골자는 소련의 핵공격을 막아낼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거였다. 그래서인지 SDI의 꼬리표엔 '스타워즈'란 별칭이 붙었지만, 세부계획은 다소 황당했다. "소련발 탄도미사일이 미국으로 날아와 목표물에 접근할 때, 자동으로 그 미사일을 파괴하는 기술을 개발하겠다."
레이건의 전통적 지지세력은 SDI가 냉전을 종식할 무기가 될 것이라며 치켜세웠지만, 몇몇 진영에선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돈도 없는 정부가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플랜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으려 한다."
이런 비판이 과한 건 아니었다. 레이건이 집권했던 1981년 미국의 국가부채는 7940억 달러, 예산 적자는 579억 달러에 달했다. 그렇다면 레이건은 어떤 확신으로 SDI를 밀어붙인 걸까. 그가 생각한 수는 무엇이었을까.
# 민간이란 히든카드
'스타워즈'를 꿈꾸던 레이건 앞엔 커다란 난관이 있었다. 다름 아닌 돈이었다. 국가 예산이 바닥을 드러낸 상황에서 SF 소설 같은 '우주전쟁' 플랜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입하자는 주장은 동력을 얻을 수 없었다.
다수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은 예상대로 보수적으로 대응했다. "대대적 플랜을 가동하려면 우선 무기구매예산이 잘 쓰이고 있는지 살펴본 다음에 비용을 늘리자." 그렇게 시작된 검증 작업에선 레이건의 힘을 빼놓을 만한 '낭비 사례'가 줄줄이 적발됐다.
이때 레이건은 상황을 반전할 카드를 꺼내들었다. 바로 '민간'이었다. 1982년 2월 그는 "'민간 전문가' 그룹을 구성해 행정부 예산을 심층적으로 검토하고, 낭비와 비효율을 제거하기 위한 권장 사항을 제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월 30일 레이건은 연방정부가 집행하는 비용을 조사하는 전담기구 'PPSSCC(President's Private Sec tor Survey on Cost Control)'를 수립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분야별 36개 태스크포스로 이뤄진 PPSSCC는 1500개에 이르는 연방정부 예산을 종합적으로 분석·평가했고, 이는 SDI 예산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근거로 활용됐다.
# 공공의 눈 vs 민간의 눈
물론 레이건의 SDI 구상은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미국의 군사적 위상을 끌어올려 소련의 무릎을 꿇리는 게 목적이었다. 미국 입장에선 힘을 과시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반작용으로 국제정세는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SDI 예산 중 일부가 교육·건강 등 사회적 프로그램의 비용으로 이뤄졌다는 비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가 긍정과 부정이 공존하는 SDI를 끄집어낸 건 이 사례가 정부예산을 통제하는 전략적 차원에서 중요한 함의를 갖고 있어서다. SDI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PPSSCC는 나랏돈을 '민간의 눈'으로 감시할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훗날 PPSSCC 소속 인사들이 정부예산을 감시하는 시민단체의 초석을 놓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나라살림을 꼼꼼하게 점검하면서 '예산을 낭비하면 우리들의 세금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부예산의 셈법을 알아챈 PPSSCC의 인사들은 자발적으로 예산낭비를 추적·관찰하는 시민단체를 만들고, 정부 예산을 감시하는 망을 구축했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공공부문에도 예산을 감시하는 시스템이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일견 타당하다. 가령, 우리나라에서 500억원 이상의 대규모 재정이 투입되는 사업은 '예비타당성조사(예타)'를 통과해야 한다. 예타 통과 후 예산을 집행할 때도 해당 공공기관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참고: 여야 정치권이 최근 예타의 기준을 완화한 이야기는 후술했다.]
하지만 공공이 공공을 감시하는 것과 민간이 공공을 감시하는 건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전자는 '눈먼 돈'을 살피는 형식적인 행위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공공 간 이해관계가 맞닿아 있을 수 있어서다. '우리가 납부한 돈(세금)'의 쓰임새를 검증하려는 민간의 행위와 결이 다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공적기관들은 나름대로 예산관리시스템을 치밀하게 만들었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랏돈이 줄줄 새는 사례는 차고 넘친다. 그 사례가 예외적이거나 시스템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개선의 여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도 않다. 공공부문의 낭비는 고질병에 가깝다. 수십년 전이든 지금이든 낭비벽은 대동소이하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 뼈아픈 현실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 넷북 촌극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A공공기관의 한 내근직 사업부 직원들은 사무용 데스크톱 PC를 모조리 '넷북'으로 교체했다. 국민의 혈세로 구입한 멀쩡한 데스크톱 PC는 모두 비정규직에게 전달했다.
외부에선 '웹서핑 정도만 가능한 넷북을 왜 내근직이 쓰려 하느냐'고 반문했지만, 그들은 귀를 닫았다. 그런데 불과 며칠 뒤부터 하나둘씩 불만이 새어나왔다. '키보드판이 너무 작아서 문서 작업을 할 수 없다' '화면이 작아서 목이 아프다' 등 예견된 불평들이었다.
이 사업부는 이런 불평·불만을 어떻게 해소했을까. 해법은 간단했다. 끊이지 않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최고급 키보드와 넷북 받침대를 나랏돈으로 다시 구매했다. 문제는 이 모든 과정이 아무런 걸림돌 없이 진행됐다는 점이다. 씀씀이를 제어하는 사람도, '예산 낭비 아니냐'며 꼬집는 사람도 없었다.
자, 어떤가. 우리나라 공공부문의 현실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질문을 던지려 한다. 이 공공기관의 사례는 '그땐 가능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일이 됐을까. 시곗바늘을 2018년과 2020년으로 돌려보자.
# 한은페이 초라한 실적
2018년 한국은행은 수억원의 예산을 들여 '한은페이'라 불리는 모바일현금카드앱을 개발했다. 금융소비자의 편의성을 높이겠다는 취지였지만, 많은 이들이 '왜 만들지'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국내 소비자의 현금결제 비중은 전체의 0.1%에도 미치지 못했다. 다양한 기능이 담긴 삼성페이·카카오페이·페이코 등 민간기업의 '페이'도 숱했다. 누가 보더라도 '현금카드앱'으론 승부를 걸기 어려웠지만, 한은은 앱 출시(2020년)를 밀어붙였다.
'예견된 미래'는 '예고된 결과'를 낳았다. 한은페이의 성적표는 초라함을 넘어선다. 출시 3년차에 접어들었지만 한은페이를 쓰는 사람도,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앱의 다운로드 수는 통계를 내지 못할 정도로 적은 수준이다.
앱 조사업체 모바일인덱스 측은 "2020년 7월 이후엔 다운로드 숫자가 데이터 누적 기준치를 밑돌았다"며 "수치가 너무 낮은 경우엔 데이터가 아예 측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나랏돈 수억원을 허공에 뿌려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도 한은 고위직 중 누군가가 '책임을 지겠다'며 나섰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담당 부서는 이제야 대책 마련에 골몰하고 있다지만, '페이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지금 한은페이를 살려낼 방법이 있을지 의문이다.
이처럼 공공부문이 나랏돈을 '쌈짓돈' 취급하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그때 그 시절 가능했던 낭비는 지금도 가능하다. 그래서인지 황당함을 넘어서는 나랏돈 낭비 사례는 수두룩하다. 그중 두가지를 더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례❶] 산림청은 20년 넘게 '겨울이 왔을 때 나무에 짚을 두르는 작업을 자제하라'고 권고했다. 나무에 되레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서다. 그런데도 상당수 지자체는 수억원을 들여 나무에 짚을 두른다. 내 돈이 들어가는 일이라면 과연 산림청의 권고를 무시할 수 있었을까.
[사례❷] 2017년부터 2021년까지 폐기되거나 폐기를 권고를 받은 공공앱은 635개에 이른다. 이들 공공앱에 들어간 나랏돈은 190억원에 육박한다. 적지 않은 혈세가 공공앱 개발이란 미명 아래 어디론가 '사라진' 셈이다(용혜인 기본소득당 의원실). 만약 내 돈이 들어간 앱이라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쉽게 폐기할 수 있을까.
# 금배지와 아우성
그렇다면 우린 여기저기서 새는 공공 부문의 지갑을 어떻게 감시해야 할까. 관점을 잠시 해외로 돌려보자. 영국엔 '의무경쟁입찰제도(CCT·Compulsory Competitive Tendering)'란 시스템이 있었다. 1979년 이후 영국 보수당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했던 제도다. 핵심은 정부 조직과 민간기업 중 가장 경쟁력 있는 입찰자에게 공공서비스의 생산·공급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1997년 노동당이 선거에서 승리하면서 폐지되긴 했지만, 민간의 힘을 활용해 공공의 방만을 줄였다는 점에선 가치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예산 감시절차에 '민간의 눈'을 적용한 레이건의 도전 역시 높게 평가할 만하다.
문제는 우리나라다. 1999년 예비타당성 조사를 도입하고, 공공기관의 예산을 정부가 승인한다고 하지만, 어차피 '그들만의 룰과 그들만의 눈'으로 감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나라살림을 감시해야 하는 국회가 제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틈만 나면 정부를 향해 '나랏돈을 허투루 쓰지 말라'고 떠들어 대지만, 정작 표가 필요할 땐 더 많은 나랏돈을 쓰게 해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최근엔 그나마 있던 '룰'마저 뜯어고쳤다. 지난 12일 예비타당성 조사의 기준 금액을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2배 높이는 '국가재정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상임위원회 소위원회를 통과했다. 예타를 거치지 않고 사업을 벌일 수 있는 한도가 높아진 셈이다.
민생법안 앞에서조차 사사건건 대치하던 여야 정치권은 '나랏돈을 더 쉽게 쓰는' 쪽으로 룰을 바꿀 땐 흔쾌히 손을 맞잡았다. 세간엔 벌써부터 총선을 앞두고 선심성 예타면제 사업이 쏟아져나올 것이란 우려가 감돈다.[※참고: 지난 17일 국회 기재위 상임위는 여론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한 듯 국가재정법 일부 개정안을 상정하지 않았다. 추가 논의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레이건과 PPSSCC, 영국 보수당 정부와 CCT… 이들을 통해 우리는 확실한 한가지를 알 수 있다. 공공부문이란 '폐쇄적 공간'에서 움직이는 나랏돈의 흐름을 '민간의 영역'으로 돌려놓을 때가 됐다는 점이다.
이쯤 됐으면 공적 조직을 향해 '당신 돈이라면 그런 사업을 할 수 있겠는가'란 질문을 맘껏 던질 때도 됐다. 이 나라가 공공의 소유물이 아니듯, 나랏돈도 아무렇게나 꺼내 쓸 수 있는 쌈짓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부도, 국회도, 그 어떤 공공기관도 믿을 수 없다면 방법은 이뿐일지 모른다.
이윤찬 더스쿠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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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서구·윤정희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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