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너도 빠지는구나”
30대 때 들은 뜻밖의 한마디
“너도 머리숱이 빠지는구나”
배우 생활 내내 마음고생해
탈모인 보면 동지처럼 위안
이젠 외모로 평가 않는 시대
개성이 될 수 있겠단 생각도
꽤 오래전의 일이다. 어느 날, 늘 어울려 다니던 사람 몇몇이 운현궁 옆에 있던 실험극장에서 연극을 본 후 길 건너 인사동에서 뒤풀이를 했다. 당시 하루가 멀다 하고 뭉쳐 다니며 끝장을 볼 때까지 마시던 우리는 요즘 말로 ‘n차’까지 가는 건 일상이었고, 때로는 동이 트도록 마시고 이른 아침 다른 사람들 출근하는 행렬에 끼여 귀가하는 일도 꽤 흔한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체력들도 좋았고, 허구한 날 그 술값들은 누가 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술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사람인데 술 안 마셔서 얄밉다고 비아냥거리면서도 나를 내치지 않은 것은, 통기타 세대인 우리는 자리가 무르익으면 언제나 노래를 했고, 그때 기타 반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의 ‘휴대용 밴드’였다. 하루하루가 별로 기억날 것도 없는 날들의 연속이던 때 ‘그날’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지금까지도 내 삶의 고민이 되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어서이다.
그날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식사가 끝나고 우리들의 아지트가 있는 한남동으로 2차를 가는 차 안에서 들은 한마디였다. 그 저녁, 아마도 연극을 같이 봤던지 이장호 감독님도 합석해서 한 잔씩들 했고, 술을 못 마시는 탓에 당시 운전은 거의 내 몫이었다. 그날도 내 차로 이동했고, 운전하는 내 바로 뒷자리에 이 감독님이 앉았다는 걸 그분 특유의 목소리를 듣고 알았다. 출발하고 얼마 후 남산 1호 터널 안으로 들어서자 운전석 쪽으로 다가앉으며 한마디 하셨다. “석우야.” 아주 친근하게 들리는 바리톤 목소리였다. “네!” 당대 최고 인기 감독님의 부름에 신인 배우는 ‘혹시 작품 얘길까’ 감읍하여 공손히 대답했다. “너도 이제 머리가 빠지는구나. 뒷머리가 비었다.” 순간 당황했으나 “네? 하하 제가요, 그럴 리가요.” 웃음으로 가볍게 넘기려 했는데 “어, 그래? 어디 봐.” 내 뒷머리를 손가락으로 헤치며 장난치듯 놀리는 일행들에게 치부를 들킨 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이 서른의 젊디젊은 배우가 탈모라니. 내 머리카락은 반고수머리에 숱이 많아서 가위로 머리카락 자르기가 힘들다고 푸념하던 단골 미용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동시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그 얘기를 들은 이후의 시간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남자들은 아침에 거울을 볼 때도 작은 거울을 들고 뒷머리를 살피는 일이 거의 없지 않은가.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뒷머리까지는 별 신경을 안 썼고, 내가 탈모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내가 성격배우라면 또 모를까. 사랑 얘기를 주로 연기하던 ‘멜로배우’에게 헤어스타일이 얼마나 중요한데 탈모라니. 얼마 후면 나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앞이 캄캄해졌다. 그러고 보니 나의 아버지도 머리숱이 위험한(?) 수준이어서 어쩌면 대비했어야 할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나의 눈은 남자들의 뒷머리를 살피고 있었다. 연기자 중에 일찍이 탈모가 진행되어 옆머리를 길러 널 듯이 이마와 탈모 된 부분을 가린 선배가 있었다. 은근히 남의 일처럼 머리카락을 어떻게 관리하냐고 물었더니, 반가운 듯 “너도 빠지는구나” 하며 해외 오지에서 동포를 만난 것처럼 행복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찌나 친절한지 짬 날 때마다 ‘열심히’ 두드려야 한다며 구둣솔같이 생긴 걸 소개한다. 돼지털로 만들었다나…. ‘열심히’라는 단어는 학창시절 이후 참 오랜만에 들었다.
그때부터 아침저녁으로 정말 ‘열심히’ 머리를 두드리기 시작하면서 탈모와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짬만 나면 두피를 열심히 두드리는 사람들 일명 ‘뇌진탕 클럽’의 탈모인들은 좋은 제품 정보도 공유하고 서로를 보며 “그래도 나는 아직 쓸 만해” 하며 서로 위안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머리카락에 투자하는 돈과 정성과 걱정은 쌓여만 가고, 기대한 만큼 결과물(?)은 보이지 않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내 머릿속만 보는 것 같아 소심한 A형이 돼 가며 대인 관계에도 조금씩 위축되기 시작했다.
두피에 검은 가루를 뿌려서 숱이 많아 보이게 하는, 나름 반가운 물건이 나오면서 연기(演技)하는 데는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나 날마다 조금씩 머리숱이 적어지는 나를 보면서 얼마나 심란하고 괴로웠던지 ‘세상 사람들 모두 다 민머리였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청춘의 절반은 위아래 나이 따지는 일로 소모했고, 남은 절반은 탈모 걱정으로 시간과 돈을 들이며 살아온 것 같다.
탈모로 고민해 본 사람들은 내 마음을 이해하리라. 세상에는 누가 눈치챌까 탈모를 숨기기에 급급한 사람도 많은데, 아예 머리카락을 밀어 버리고 시원하게(?)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서 용기 있는 그들의 선택에 응원을 보낸다. ‘까짓거 세상에 흔한 일인데 뭐’ 하며 머리카락이 없으면 없는 대로, 가발을 쓰면 쓴 대로 TV에 나와 탈모에 얽힌 에피소드를 즐겁게 얘기하며 박장대소하는 프로그램을 보면서, 탈모는 이제 부끄러워 숨기기만 할 일이 아니라 결정하기에 따라서는 개성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안경 쓴 사람을 ‘안경잽이’라고 놀리고 심지어 ‘재수 없다’고까지 했고, 가발 쓴 사람을 발견하고는 엄청난 정보 알려주듯 주변에 귓속말로 수군대며 놀리던 철없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지금의 젊은이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주 더딘 속도지만, 외모로 사람을 비하하지 않고 겉모양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는 성숙한 인간이 많아지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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