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입수]친노·친문·친명 돈줄 적힌 ‘이정근 노트'...판도라 상자 열렸다
이정근, 지난해 9월 구속되기 전 구술로 남겨…현역 의원 14명 포함 51명 실명 등장
(시사저널=조해수·김현지·공성윤 기자)
2021년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과정에서 이정근 전 민주당 사무부총장 등 송영길 대표 후보 캠프 관계자 9명이 국회의원 등에게 9400만원을 살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사건은 3만여 개에 이르는 '이정근 녹취파일'에서 시작됐다. 이 전 사무부총장은 2016년부터 7년여간 휴대폰의 자동녹음 기능을 활용해 전화통화를 녹음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 녹취파일을 '이정근 10억원 수수 사건' 수사 과정에서 확보했다.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은 각종 청탁의 대가로 사업가 박우식씨로부터 10억여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돼, 4월12일 1심에서 징역 4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 밖에 9억8000여만원이 추징되고 박씨에게 받은 명품도 몰수됐다.
박우식씨 역시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과의 전화통화를 모두 녹음했는데, 검찰은 이 녹취파일 역시 입수했다(2022년 10월21일자 , 10월28일자 기사 참조).
"이정근, 민주당이 도와주지 않자 전부 털어놔"
이런 가운데 검찰은 녹취파일 외에 돈 전달 과정 등이 상세히 기록된 이른바 '이정근 노트'를 확보했다. 검찰 측은 "수사팀(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이 이정근 노트를 가지고 있다"면서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없다"고 밝혔다. 반면, 이 전 사무부총장의 변호인 정철승 변호사는 "이 전 사무부총장이 뭔가를 적어놓는 스타일이 아니다"면서 "이정근 노트는 없다"고 주장했다.
시사저널은 10억원 수수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이 구술하고 지인이 육필로 정리한 A4용지 5페이지 분량의 문건을 단독입수했다.
문건엔 친노계, 친문계, 친명계의 자금줄이 대략적으로 정리돼 있다. 각 계파 핵심 인물들의 관계도를 그리고, 중요 인물에 대해서는 설명을 달았다. '노무현', '문재인', '재수회(문재인을 재수시켜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모임)', '류영진(문재인 정부 초대 식품의약품안전처장)', '이재명 7인회' 등의 제목으로 각각 A4용지 1장 분량으로 작성됐다.
현역 국회의원 14명을 비롯해 51명의 실명이 등장한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문건이 검찰이 확보했다는 이정근 노트와 동일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내용적으론 겹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문건 작성 과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노트가 쓰여진 배경에 대해 "검찰의 수사가 좁혀오고 구속될 위기에 처하면서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이 엄청나게 불안해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면서 "그런데 민주당이 도와주지 않자 이 전 사무부총장이 자신이 아는 것을 전부 털어놨다. 이 문건은 그것을 기록한 것"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노무현' 노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한국공공기관감사협회 회장을 지낸 A씨다. 노트에는 A씨가 "부산 인맥 관리"를 맡은 것으로 나온다. "딸이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했는데, "박우식에게 관외에서 사람을 붙여주고,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자신의 딸을 통해 인사청탁 알선 등을 해결함"이라고 자세히 소개돼 있다. 또한 A씨가 노영민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특수관계"라는 관계도가 그려져 있다.
"김영배 의원, 박우식이 꾸준히 용돈 줌"
친문계와 관련된 노트는 '문재인', '재수회', '류영진' 등 모두 3장이다. 먼저 '문재인' 노트를 살펴보면 친문계 주요 인물들이 망라돼 있다.
관계도의 한가운데에 김영배 민주당 의원이 적시돼 있다. 김 의원에 대해서 "성북구청장, 청와대 비서실 시절 (박우식과) 지속적 금전지원 관계"라면서 "(김 의원이) 최고의원 회의(에서) 인맥동원하여 주로 박우식 등의 요구를 해결"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류영진' 노트에서도 "김영배 국회의원-김영배가 성북구청장 및 청와대 근무시절, 박우식이 꾸준히 용돈을 줌"이라고 나온다.
김영배 의원은 박우식씨가 직접 녹음한 파일에도 등장한다. 시사저널은 박씨의 2013~14년 녹취파일을 단독입수했다. 수백 개가 넘는 파일에는 박씨가 통화하거나 만난 정·관·재계 인물들의 육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2020년 1월6일자 기사 참조). 다음은 녹취파일 중 박씨가 정현태 전 남해군수에게 말한 내용이다.
"그랬더니(2008년 부산자원 특혜 대출 사건으로 구속됐더니) 영배가 면회 와 가지고 눈물을 뚝뚝뚝 해 갖고, 영배를 내가 따귀를 때렸어요. 사나이 새끼가 이렇게 약해 가지고 무슨 정치를 해 먹느냐고. (내가 김영배에게) '앞으로 두 번 다시 면회 오지 마라. 니들 잡으려고 그렇게 발버둥치는데 면회 오는 자체가 나는 달갑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내가 입이라도 조금 무겁다면 무거운 놈입니다."
김영배 의원은 친노-친문 핵심 인물이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청와대 정책조정비서관실·정무기획비서관실·민정비서관실 행정관과 행사기획비서관을 지냈다. 2010년에는 성북구청장에 당선됐고 재선까지 성공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민주연구원 부원장을 거쳐 2018년 정책조정비서관으로 청와대에 재입성했고, 백원우 전 비서관에 이어 2019년 8월까지 민정수석실 민정비서관을 지냈다.
김영배 의원은 "박우식씨는 참여정부 출범 이전에 부산에서 알게 된 사이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끊겼고, 그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면서 "박씨에게 면회 간 사실이 없다. 아마 박씨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해 내 얘기를 꾸며서 하고 다닌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밖에 노트에는 "(박우식이) B(친문계 중진의원), C(친명계 재선의원), D(범친문계 재선의원) 등 5000만원 등 자금을 넣어줌"이라고 기록돼 있다.
"태양광·홈앤쇼핑, 친문 핵심 정치인의 자금책"
친문 핵심 E씨의 "자금책"으로는 "허인회 태양광", "홈앤 쇼핑"이라고 적시돼 있다.
태양광 사업가 허인회씨는 '86세대 운동권 대부'로, 노무현 정부 때 열린우리당(민주당 전신) 청년위원장을 지냈다. 서울시 감사위원회는 2021년 10월, 박원순 전 서울시장 시절(2014~20년) 추진한 '미니 태양광 사업'을 대대적으로 감사했다. 허씨가 이사장으로 있던 녹색드림협동조합은 태양광 사업 보조금으로 서울시에서 37억여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2019년 감사원은 서울시가 태양광 사업자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녹색드림협동조합에 특혜를 줬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녹색드림협동조합은 국산 태양광 모듈을 사용한다고 속이고 실제론 중국산 유사제품을 시공해, 에너지공단으로부터 정부지원금 부정수령에 따른 환수 조치를 받기도 했다.
홈앤쇼핑의 최대주주는 중소기업중앙회다. 이 때문에 홈앤쇼핑은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지 않다.
문재인 정부 시절, 이른바 '캠코더(캠프, 코드, 더불어민주당)' 출신 낙하산들이 홈앤쇼핑에 대거 들어가 논란을 빚었다. 2018년 10월, 정유섭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의원이 공개한 홈앤쇼핑 이사진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외곽조직인 '담쟁이포럼'의 발기인 노승재씨, 김근태 민주주의연구소 소장을 역임한 최상명 교수 등이 포함돼 있다.
특히 비상임고문으로 재직했던 김승남 전 민주당 의원, 김정호 전 민주당 정책위 부의장은 월급 2500만원·법인카드(월 1000만원 한도)·차량(제네시스 EQ900)·운전기사 등을 제공받는 등 파격 대우를 받았다.
중소기업중앙회와 관련한 내용도 있다. 노트에는 중소기업중앙회 고위 임원인 F씨와 G씨에 대해 "H(박우식의 측근)가 요청하는 중소기업 대출 알선 등 처리"라고 쓰여 있다.
'재수회' 노트에서는 재수회를 "한달에 한 번씩 모임", "2013년부터 2015년까지 문재인이 직접 참석함", "보안상의 이유로 2016년 문재인 대통령 선거를 기회로 자진해산"이라고 설명했다. 이 밖에 "비밀유지를 위해 하부조직 회원들 간 서로 얼굴을 모르게 함", "회비 및 자금조달은 몇몇 멤버들만 알게 하고 비밀에 부침"이라는 내용도 눈에 띈다.
"돈 만드는 작업 담당"으로는 "행동대장 I" 외에 8명이 거론됐다. 여기에는 2명의 현역 민주당 국회의원을 비롯해 문재인 정부 청와대 출신 4명, 대선캠프 출신 1명, 언론인 출신 1명이 포함돼 있다. "옛 원로인사"로 소개된 "J, K"의 경우에는 "돈은 안 만듦"이라는 설명이 붙었다.
"류영진 전 식약처장, 문재인의 자금관리자"
류영진 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이재명 7인회'를 제외한 모든 노트에 등장한다. 모두 "문재인의 자금관리자"로 기재돼 있다. '류영진'이라는 노트가 따로 존재할 정도다. 류 전 식약처장은 부산 출신으로 10여 년 전부터 문재인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최측근이다. 노트에서는 류 전 식약처장을 "부산대 병원 약사 출신", "부산, 경남 지역 자금책", "E(친문 핵심) 비자금 관리"라고 소개했다.
'류영진' 노트의 관계도에서 류 전 식약처장은 재수회 등을 아우르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재수회 멤버 중 일부를 "류영진 집에서 모이고, 잠자는 멤버들", "효자동 갤러리에서 회동"이라고 설명했다.
류영진 전 식약처장은 '이정근 10억원 수수 사건'에도 등장한다. 박우식씨는 T회사의 마스크 생산과 수출이 금지된 것을 해결하고 KF 인증 품목허가를 받아 달라고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에게 청탁했다. 이에 이 전 사무부총장은 "마스크 문제는 민감한 사안이다. 류 전 식약처장을 만나보겠다"고 말했다.
이후 류영진 전 식약처장은 실제로 식약처 고위 공무원과 T사를 연결해 줬다. 박우식씨는 이때 2억원을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노트에는 박씨가 류 전 식약처장에게 "마스크 사업 건으로 1억 건네줌"이라고 적혀 있다.
류영진 전 식약처장은 "T사가 식약처 담당자를 만나 상황을 설명해준 것이 전부다.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이 설령 청탁 자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정치인이 정치인한테 돈을 전달하는 경우는 없다"면서 자신은 돈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이 문재인 전 대통령의 자금관리자로 거론된 것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사실 무근"이라면서 "이 전 사무부총장이 그런 걸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소설에 불과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00억원짜리 CD, 현역 의원 통해 현금화"
'이재명 7인회' 노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박우식이 이정근에게 100억짜리 양도성 예금증서(CD) 30장을 보여주며 '너는 이런 것도 못 받고 뭐 했냐'라는 식으로, L의원과 M을 통해 바꿨다며 카톡으로 보여줌"이라는 대목이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L의원은 대표적인 비명계 의원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노트 작성 과정을 잘 아는 관계자는 "박우식씨가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에게 '이 CD는 또 다른 민주당 거물 정치인 N의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고 밝혔다. 검찰도 이 같은 정보를 입수하고 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박씨는 "이 전 사무부총장에게 CD 현금화를 부탁한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사업할 때 현금 대신 받은 CD일 뿐 정치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2022년 10월21일자 기사 참조).
이 밖에 이재명 7인회 멤버인 O의원은 노트에서 "인사청탁, 알선 등에 대해 (박우식과) 주로 텔레그램으로 주고받았다고 하며 이정근에게도 자랑삼아 얘기하며 문자 보여줌"이라고 적혀 있다.
노웅래 민주당 의원에 대한 대목도 있다. "H(박우식의 측근)를 통해 (노웅래 의원이) 5000만원을 요청해 박우식이 H와 P(박우식의 운전기사)를 통해 줬으나, 박우식의 청탁 등 협박으로 인해 급하게 다시 돌려줌"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현재 노웅래 의원은 박우식씨로부터 2020년 2~12월 발전소 납품 사업 편의 제공, 물류센터 인허가 알선, 태양광발전 사업 편의 제공, 인사 알선, 각종 선거자금 등 명목으로 5차례에 걸쳐 6000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상태다.
노웅래 의원 사건은 지난해 11월16일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부장 김영철)가 노 의원의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마포구 지역구 사무실 등을 압수수색하면서 처음으로 알려졌다(2022년 11월16일자 기사 참조). 그러나 이 노트는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이 구속된 지난해 9월 전에 작성된 것으로, 노 의원 사건이 구체적으로 기재돼 있다. 이 노트의 신빙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정근 "나는 지금도 로비스트야"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은 어떻게 친노계·친문계·친명계를 넘나들며 그들의 돈줄을 알고 있었을까.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은 전북 군산 출신으로 군산여고-원광대 국어교육학과를 거쳐 MBC 《PD수첩》 취재리서처로 활동했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 카피라이터로 정계에 입문했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2017년 대통령선거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부본부장, 2019년 대통령 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자문위원, 2021년 민주당 사무부총장을 거쳐 2022년 대선에서는 이재명 후보 선대위 부본부장을 맡았다.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기사 참조).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을 좀 더 알 수 있는 중요한 진술은 10억원 수수 사건 판결문에서 찾을 수 있다. 판결문에 따르면, 이 전 사무부총장은 자신을 '로비스트'라고 반복적으로 지칭했다. 다음은 판결문에서 이 전 사무부총장이 박우식씨에게 말한 내용을 인용한 부분이다.
"나는 지금도 로비스트야. 나는 내가 해보니까, 로비스트로서 기질이 있어. '나는 역시 로비스트가 맞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해…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도와주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은 현재 검찰 수사에 협조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전 사무부총장이 검찰과 플리바게닝(plea bargaining)을 맺었다는 관측도 나온다. 플리바게닝은 유죄를 인정하거나 수사에 협조한 인물의 형벌을 낮춰주는 제도다. 우리나라에선 현행법상 허용되지 않지만, 검찰이 암묵적으로 플리바게닝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검찰은 10억원 수수 사건에서 이정근 전 사무부총장에 대해 징역 3년을 구형했는데, 1심 재판부는 검찰 구형보다 많은 4년6개월을 선고했다.
이와 관련해 검찰 출신 조응천 민주당 의원은 라디오에 출연해 "10억원대 금품수수·알선수재에 정치자금법 위반까지 되면 제 감으로는 5년 정도 구형해야 마땅한 것으로 본다"면서 "이정근씨가 수사에 협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검찰이 3년을 구형했다는 것은 집행유예를 내달라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3년 이하의 징역형의 경우 집행유예 선고가 가능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반면 정철승 변호사는 "이 전 사무부총장과 얼마 전 직접 만났는데, 플리바게닝 의혹에 대해 '그런 일 없다'고 강하게 부인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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