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아무리 발전해도 언어에선 인간 이길 수 없다[북리뷰]
모텐 H 크리스티안센·닉 채터 지음│이혜경 옮김│웨일북
‘제스처 게임’ 가설 통해
인류 ‘언어의 진화’ 추리
즉흥 · 우연 요소가 얽혀
정교해진 체계 갖춰나가
대화엔 창조성·맥락있어
수학적 체계로 환원 못해
AI는 유머·장난기에 한계
‘언어의 기원’은 현대과학이 풀지 못한 미스터리 중 하나다. 인류가 최초로 사용한 언어는 무엇인지, 인간의 의사소통이 어떤 과정을 거쳐 정교해졌는지는 여전히 안갯속이다. ‘진화하는 언어’(원제 ‘The Language Game’)의 저자들은 ‘제스처 게임’이라는 흥미로운 가설을 통해 그 기원을 추적한다. 제스처 게임은 상대의 몸짓만 보고 무엇을 표현하는지 알아맞히는 놀이다. 책은 언어를 갖지 못했던 고대 인류 혹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던 집단의 소통이 바로 이 제스처 게임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론한다. 제스처 게임처럼 과거 인류의 소통 역시 즉흥적이고 우연적인 요소가 얽히면서 점진적으로 정교한 체계를 갖춰나갔다는 얘기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의 유전자에 언어능력이 선천적으로 내재해 있다거나, 다른 언어 속에 공통의 수학적 원리가 숨어 있다는 전통 언어학 이론을 전복한다.
저자들은 언어의 핵심이 즉흥성과 우연성이라면, 인공지능(AI)이 아무리 발달해도 ‘언어 게임’에서 인간의 적수가 되기 힘들다고 말한다. 제스처 게임의 즉흥성을 배제한 채 과학적 원리에만 의존하는 AI 언어는 인간만큼 창의적 언어를 생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은 언어 게임을 ‘바다 위 빙산’의 이미지로 도식화한다. 대화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단어와 문장은 수면 위에 있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수면 아래에는 문화적 규범과 감정이입, 관행과 관습, 공감능력 같은 수많은 요소가 잠겨 있다. 체계적 문법에 구애받지 않고, ‘생략’이 넘쳐나는 상대의 이야기를 청자가 쉽게 이해하는 건 ‘보이지 않는 맥락’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수면에 잠긴 부분을 포착하는 과정은 몸짓에서 의미를 유추하는 제스처 게임의 원리와 비슷하다. 말(言)을 활용한 소통이 금지된 제스처 게임이 역설적으로 언어의 작동 방식에 관한 통찰을 열어주는 셈이다. 저자들은 인류의 다른 발명품이 그렇듯 언어 역시 무계획적인 우연의 산물에서 점차 질서를 갖춘 모델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춤을 추듯 즉흥적이면서 협력적인 언어 게임에선 부족한 뇌 용량도 큰 문제가 안된다. 화자가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경우 청자의 뇌에는 극심한 ‘병목 현상’이 일어난다. 하지만 청자는 공유하는 맥락에 더해 의미 있는 정보를 연결하는 ‘청킹(chunking·덩이짓기)’을 통해 화자의 메시지를 수용한다. 예컨대 ‘muegaglegana’처럼 무작위로 제시된 알파벳 순서는 단번에 기억하기 힘들지만, 같은 알파벳을 배치만 바꾼 ‘languagegame’은 ‘language’와 ‘game’이라는 두 단어를 청킹해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우연적 요소에 주목하는 저자들의 이론은 놈 촘스키 이후 반세기 넘게 맹위를 떨친 의사소통 연구를 거스른다. 미국 언어학자인 촘스키는 언어학 이론에 수학적 엄밀성을 도입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가 정립한 ‘생성 문법’ 이론은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처럼 인간의 자연 언어에도 수학적 규칙이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지역과 민족에 따라 다른 ‘기표’로 나타날 뿐 언어 구조의 바탕엔 동일한 생성 원리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촘스키는 아이들이 추상적 체계를 경험으로 학습하는 건 불가능한 만큼 “인간은 선천적으로 유전자에 ‘보편 문법’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최신 연구는 촘스키 이론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드러낸다. 세계 각지로 퍼져나간 학자들은 7000개가 넘는 언어 가운데 ‘부사 없는 언어’ ‘형용사 없는 언어’ ‘시제와 대명사가 없는 언어’ 등이 다양하게 섞여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언어 게임을 수학적 체계로 환원할 수 있다는 믿음은 착각이다. 언어의 무(無)규칙성과 불안정성은 ‘결함’이 아닌 ‘본질’이다. 언어 연구가 ‘생물학’에서 ‘문화’로 이동해야 하는 이유다.” 이처럼 광범위한 이질성과 다양성을 고려하면 각종 ‘신조어’와 ‘통속어’에도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 언어 근본주의자들은 언제나 ‘요즘 말’에 대한 걱정을 쏟아내지만, 새로운 세대의 언어엔 활기와 창조성의 징후가 녹아 있다. 저자들은 “질서가 무너진다고 혼돈이 도래하지 않는다”며 “언어는 유동적이고 불완전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근사한 결과를 낳는다”고 강조한다.
언어를 활용한 정보 취합과 글쓰기 방식은 챗GPT 등장과 함께 근본적 변화를 맞고 있다. 인간이 창조한 AI가 인간을 능가하는 ‘특이점’이 몰고 올 파국적 미래에 대한 우려도 쏟아진다. 하지만 AI는 즉흥성이 좌우하는 언어 게임의 승자가 되기는 어렵다는 게 저자들의 생각이다. AI에는 단순히 잘못된 팩트를 생성하는 것을 넘어 돌발적인 인간의 유머와 장난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말(馬)과 자동차의 역사에서 AI와 인간의 미래를 유추한다. 자동차는 과거 말이 수행한 일 중 하나인 ‘수송’에 탁월한 능력을 보이지만, 말의 복잡한 생명활동을 모방하지 못한다. 특이점으로 인류가 실존적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전망은 ‘자동차끼리 무리 지어 다니며 자유롭게 짝짓기하는 상황’을 걱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공상(空想)이다.
진화이론 창시자인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시작은 단순했다. 하지만 바로 그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형태들이 끝없이 진화했고, 지금도 진화하는 중이다.” 생명 유기체의 진화에 관한 문장이지만, 이는 언어의 진화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책은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소통 욕구와 언어적 유연성의 결합 위에서 구축된 인류 문명의 힘을 과학적이면서도 창의적인 시선으로 펼쳐 보인다. 448쪽, 2만4000원.
나윤석 기자 nagija@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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