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수면 아래 '빌라왕' 더 있을 것"…숨죽인 화곡동 일대
(서울=뉴스1) 최서윤 기자 = "6개월째 거래 올스톱(all stop)입니다."
20일 찾은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일대 부동산은 들어서는 곳마다 썰렁했다. 지하철 5호선 까치산역·화곡역·우장산역과 9호선 등촌역 사이에 걸쳐 화곡 1~8동과 우장산동부터 등촌동 등 인근에 걸쳐 빌라와 저층 아파트 밀집 지역은 사실상 신규 거래가 안 된다는 것이다.
발단은 지난해 발생한 '빌라왕' 사건이다. 화곡동과 인천에 빌라와 오피스텔 1000여 채를 소유한 남성이 세금 62억원을 체납하고 작년 10월 돌연 숨진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동산 업계에선 쉬쉬하던 '폭탄'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화곡동 소재 A 개업공인중개사는 "발표가 12월에 나고 대대적으로 보도가 된 뒤로 지금까지 신규 거래계약서는 전세 딱 하나 썼다"며 "그 외엔 수수료가 5만원 정도밖에 안 되는 계약 연장 건 두세개 쓴 게 전부다"라고 했다.
그는 "손님도 없고 물건도 없다. 부동산을 내놔도 안 나가는 분위기"라면서 "사실 까치산역 중심으로 사기가 많고 등촌역 주변은 상대적으로 깨끗한 편인데 화곡동 전체가 묶이면서 거래가 막혔다.13년째 중개사를 하면서 이렇게 거래가 안 되긴 처음"이라고 했다.
화곡동 B 중개사는 "어디까지 전세사기로 봐야 할지, 제대로 사기죄 처벌은 되는지 법적으로 애매하긴 하다"면서도 "2021년 너도나도 부동산 시장에 뛰어들 땐 1000만원만 들고도 투자한 게 빌라다 보니 지역 곳곳이 사실상 시한폭탄"이라고 말했다.
빌라의 경우 매매가와 전세가 사이의 갭(gap)이 작은데, 집값이 끝없이 오를 것만 같던 때 소액 자본으로 투자해 임대해온 집주인 중엔 2년 뒤 떨어진 전세금 차액을 돌려줄 여력이 없는 경우가 많다. 소위 역(逆)전세, '깡통전세' 위험이다.
다만 세입자 대부분이 주택도시보증공사(HUG) 전세보증보험을 가입했기 때문에 전세 만기가 된 세입자는 HUG에서 보증금을 돌려받아 이사를 나갈 수 있다. 이후 HUG가 임대인에게 구상권을 청구, 보증금과 이자를 받아 보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화곡동 빌라 투룸에 거주하는 C씨의 경우처럼 직장이 최근 여의도에서 판교로 바뀐 경우 언제 이사를 나갈 수 있을지 기약 없이 발이 묶인다. HUG에서 보증금을 돌려받으려면 만기를 채워야 하고, 내놓은 집은 거래 문의조차 없다고 한다. 집주인도 임대사업자이다 보니 대출도 못 받아 돌려줄 돈이 없다며 버티고 있다.
현재 가장 문제가 되는 조직적 '사기'의 경우 건축업자가 신축빌라를 지은 뒤 감정평가사에게 웃돈을 주고 집값을 '뻥튀기'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이전에도 전세사기가 있었지만 지금 터진 문제의 사기는 HUG 보증 하에 전세자금대출을 90%까지 허용한 제도적 허점과 집값 급등 물결을 타고 2018년부터 본격화했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예를 들어 2억원인 집을 3억원으로 감정한 뒤 세입자를 구하면, 이 세입자는 3000만원을 내고 2억7000만원을 은행에서 대출받아 전세금을 내는 식이다. 업자들은 7000만원의 차익을 나눠 갖고 일부를 세입자에게 대출 이자나 관리비 명목으로 제공하는 '혜택'을 준다. 화곡동에선 비일비재했다는 이런 식의 계약에서 '세입자도 집값이 뻥튀기 됐다는 걸 인지한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 중개사는 전했다.
이렇게 수백 채가 전세 거래된 상황에서 건축업자가 직접 파산하거나 잠적하면 소위 '건축왕' 사건이 되고, 건축업자로부터 매매가와 전세가 사이의 적은 갭을 지불하고 집을 전부 사들인 집주인이 파산하면 '빌라왕' 사건이 되는 셈이다.
최근 전셋값이 30%가량 하락한 가운데, 집을 많이 사들였을수록 높아지는 종합부동산세를 감당 못해 파산하기도 하고, 집을 매수할 때 이용한 금융부채로 무너지기도 한다. 빌라왕 중엔 이런 구조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건축업자나 분양업자의 속임수에 넘어가 (매매가보다 높은 전세금을 돌려줘야 할) 집을 떠안은 이들도 있고, 상승장이 영원할 것으로 믿고 일확천금을 노린 청년도 있다.
결국 이 피해를 고스란히 임차인이 떠안거나, HUG 보증보험가입 매물의 경우 공공이 떠안게 되는 구조다. 지난해 HUG의 대위변제액은 9241억원. 올해는 액수가 2조원에 달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B 중개사는 "건축왕뿐만 아니라 '오피스텔왕'도 많다. 인근에 곧 전세사기 사건이 터질 것으로 예상되는 오피스텔들이 여럿 있다"며 "처음 빌라왕 사건 터졌을 땐 위기가 3~4개월 갈 줄 알았는데, 지금 보면 다 터져야 끝날 것 같다.2022년 말 전까진 거래됐던 전세 만기가 도래하는 2024년까지는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꼭 빌라나 오피스텔을 수백 채씩 소유한 'ㅇㅇ왕'이 아니라도, 뻥튀기 된 가격에 집을 사들여 임대를 내놓은 이들도 떨어지는 매매·전세가를 방어하지 못해 피해를 야기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까치산역 앞 D 중개사는 "지금 시장은 패닉(panic)"이라며 "가격이 20% 빠지면 '급락', 30% 빠지면 '급급락'으로 부르는데 이미 고점 대비 30% 빠진 상황에서 다음 달부터 HUG 보증보험 가입 기준이 공시가격의 150%에서 126%로 낮아져 전세가가 더 뜬다"고 했다.
이를 두고 A 중개사는 "정상화 되는 과정이긴 한데 혼란이 클 것"이라고 했고, D 중개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책이 너무 급격하게 바뀌면서 시장이 왜곡되는 게 안타깝다"고 호소했다.
sabi@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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