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파멸적 운명을 넘어서는 인간의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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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여러 번 곱씹어 읽고 빼어난 해설을 살펴보면서 늘 느끼는 바가 있다.
결국 고전 읽기는 풍경의 액자화이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풍경 전체를 조망하기보다는 오늘의 문제의식이라는 액자로 그 풍경의 일부만 받아들이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안티고네와 메데이아를 여성적 영웅으로서 재평가하고 그 현재적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한 것도 지은이의 해설 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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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의 인문산책]
비극의 비밀
강대진 지음 l 문학동네(2013)
고전을 여러 번 곱씹어 읽고 빼어난 해설을 살펴보면서 늘 느끼는 바가 있다. 결국 고전 읽기는 풍경의 액자화이더라는 것이다. 당대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사유의 끝자락에서 건져 올린 언어의 형상물이 빚어낸 풍경은 눈부시고 다채롭다. 하지만, 지금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풍경 전체를 조망하기보다는 오늘의 문제의식이라는 액자로 그 풍경의 일부만 받아들이기 마련이라는 말이다. 내가 이즈음 희랍 비극을 보면서 새삼 깨닫는 것도 바로 이 사실이다.
희랍 비극이 펼쳐놓은 풍경은 실로 찬란하고 풍요롭다. 운명이라는 함정에 빠져 단말마적 고통을 겪으며 몰락하면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이 고전을 자꾸 능력주의에 대한 해독제로 액자화해 읽는다. 일찌감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무릇 비극은 한 인물이 행복에서 불행으로 빠지는 구도로 짜여 있다. 탁월했으며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어떤 이유인가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들이 무능해서 그런 수치를 겪게 된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알랭 드 보통도 지적했듯 “주인공에게 닥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닥쳤을 경우 자신도 언제든지 파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겸손해”지게 된다.
영웅의 몰락이 그 능력 없음에 있지 않다고 여기고, 나도 그런 상황에 놓이면 파멸하고 말았을 거라는 공감은 능력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억압하는 지배 심성에 균열을 낼 가능성이 크다. 내가 억세게 운이 좋아 그런 상황에 놓이지 않아 여전히 버틸 뿐이라고 인정한다면, 오늘 성취하고 유지하는 기득권이 알량해 보이기 마련이다. 능력주의를 이겨내는 데는 철학적 담론과 사회과학적 분석과 더불어, 남의 처지를 미루어 짐작하는 문학적 상상력이 요구된다는 뜻이다.
그러다 문득, 희랍 비극을 지나치게 액자화하지 말고 전경을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전체를 조망한 경험이 있어야 오늘의 문제의식으로 해석하는 데도 도움이 되겠다 싶었던 셈이다. 그래서 읽은 책이 강대진의 <비극의 비밀>이다. 이 책은 희랍 비극에 관한 기초 상식부터 문제작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설까지 두루 아우르고 있다. 희랍 비극이 낮에 공연되었다는 점, 배우가 많아야 세 명만 있었다는 점, 끔찍한 장면은 무대 뒤에서 일어나거나 전령이 보고하는 말로 대신한다는 점, 여주인공이 조용히 떠나면 무서운 일이 뒤따른다는 점 등속은 미리 알아두어야 할 상식이다.
아이스퀼로스의 <자비로운 여신들>을 해설하는 대목은 인상 깊다. 이른바 ‘오레스테이아 3부작’의 두 작품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이 관철된다. 하나, 이 작품에서 작가는 피의 복수라는 악순환을 끊는 방도로 재판제도를 내세웠다. 지은이는 이를 두고 “인류역사에서 사고가 비약하는 순간을 재현”했다고 평했다. 안티고네와 메데이아를 여성적 영웅으로서 재평가하고 그 현재적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한 것도 지은이의 해설 덕이다. 파멸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에우리피데스의 <힙폴뤼토스>를 해설하며 지은이는 “인간 사이의 유대와 공감”을 말했다. 능력주의가 판치는 오늘에 더 요구되는 덕목이다.
이권우/도서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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