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오늘의 진귀한 불행을 잊을까…문학을 달리는 ‘시인’
2년새 산문집 3권·시집 2권 이어
첫 소설까지…2030대 독자군 형성
나의 미치광이 이웃
이소호 지음 l 위즈덤하우스 l 1만3000원
시인에겐 얼마 간의 ‘신비주의’가 붙는다. 생략과 은유의 문학이라 그럴 것이다. 최근 10년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한 시인들만 보아도 그러한데 한 시인의 행보는 자못 다르다. 행위 예술가처럼 ‘행위 시인’이 존재한다면 그의 명함이겠다. 본명의 이경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약 4개월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네 권의 책을 써내는(산문집 <서른다섯, 늙는 기분>, 2022) 필명의 시인 이소호(35).
2014년 <현대시>로 등단, 2018년 37회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시집 <캣콜링>을 통해 20~30대 독자들과의 접점이 커지더니 2021년부터 지금까지 산문집 세 권과 시집 두 권을 냈고, 자신의 첫 소설 한 권을 다음 달 17일 출간할 예정이다. 에세이만 보더라도 유년의 경진, 청춘의 사랑 연애, 삼십 대 늙음의 감각을 자전-성장적으로 드러낸다.
작품이 이렇게 집결되다 보니 통섭한다. 이소호의 시는 이소호의 소설로 이소호의 소설은 이소호의 시로 파장을 증폭하고, 시와 소설은 이소호의 에세이로 더 많은 각주를 얻는다. 글이 군락을 이뤄, 자연인과 작가의 생장이 어떻게 결합되는지를 다면으로 보게 한다. 여기엔 신비주의가 없다. 아니, 작가는 자신을 씨앗 삼아 모두 활자로 피우겠단 심산 같다.
갓 출간된 세 번째 시집 <홈 스위트 홈>(문학과지성사)은 올해 이상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최진영(42)의 단편 제목과 같다. 최진영이 암 수술 뒤 70%의 재발 가능성을 품고 어느 폐가로 옮겨간 여성의 이야기로 사실상 죽음까지 기억할 안식처로서의 집을 비로소 지어가는 홈(home)을 그린 데 반해, 이소호는 허물어 들추며 기억되어야 할 공간으로서의 홈을 그린다. 허물지만 생(生)에 가깝고, 짓지만 몰(歿)에 가까워 둘은 삶에 필연으로 엮인다.
홈 스위트 홈
이소호 지음 l 문학과지성사 l 1만2000원
생을 까발리는 데 작가 이소호가 허물려는 홈이 있다.
“가정주부로 살아온 자는 죽을 때도 주부로 죽는다// 집안일에는 은퇴가 없으니까// 내 꿈은 가정주부/ 사계절 일용직/ 시인은 비정규직이에요/ 저는 집이 없어요/ 재산도 없어요//…// 오늘의 진귀한 불행을 잊을까/ 타자기 앞에 손을 올린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빠는 소리쳤다/ 딸년은 고고하게 앉아 글이나 쓰고 있는데/ 내가 저 돈을 다 대야 한단 말이야?//…// 나는 방 안에 꼼짝 않고 밤새 노안은 절대로 살필 수 없을 만한 크기의 글씨로 빈 바닥을 조용히 채웠다// 살려주세요”(‘홈 스위트 홈’ 부분)
이 시대 여성 시인에게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같은 ‘빈집’(기형도)의 서늘한 위로도 없다. “단지 조금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텔레비전 속에는 죽음이 즐비하고/ 희망은 날씨뿐이다” “잊지 마 얘들아 집에서도 누군가가 늘 너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구성원’, ‘손 없는 날’, ‘특선 다큐멘터리’ 각 부분)
<한겨레>와 한 19~20일 인터뷰에서 “진짜가 아닌, 만들어낸 세계의 이소호”란 점을 시인 스스로 강조했듯, 이것이 적나라한 은유라는 점은 시로도 감지된다. 미래에의 기억을 배반하고 억압하는 원형적 공간이 시인이 지금 모두 허무는 집들이다. 소녀에겐 학교일 수도, 난민에겐 국가일 수도.
배반의 기억과 파장을 서른 중반 작가가 여전히 주목한 형식이 자신의 첫 소설 <나의 미치광이 이웃>이겠다.
기후-식량 위기를 맞아 예술품, 박물관, 극단, 마침내 도서관까지 비용 낭비라며 파괴해버린 시대. 직전 “집 평수는 조금씩 작아”지는 가운데 베를린 예술대학에서 비싼 유학까지 마친 유리. 하지만 그 대학의 ‘천재’는 단연 유리의 기숙사 동거인 미아. 나머진 들러리. 문화폭동 이후 유리는 파괴된 고전 명작들을 디지털로 재생해 소개하는-뜻밖으로 잘 나가는-‘인스턴트 아티스트’로 살아가지만, 정작 천재 미아는 자취를 감췄다.
장치들이 흥미롭다. 동료 학생들이 질시했던 미아의 독창성은 존재 불안한 불법 난민의 처지에서 비롯한 것이고, 미아를 추켜세우는 대학은 미아의 다른 가족을 죽게 한 반인도적 국가의 편리한 허울이다. 미아는 어떤 훌륭한 작품도 계약서를 작성할 신분이 되지 못해 팔 수 없다. 창작을 열망했던 유리가 모사한 작품은 ‘밈’처럼 소비된다. 예술의 쓸모와 작가의 정체성, 나아가 둘의 진로를 “신나게” “글쓰기의 신이” “강림하”듯 달려온 작가 이소호가 제 첫 소설로 되묻고 있는 모양새다.
소설서도 확인되는바, 원시적 공간의 부조리는 난민의 정체성으로 극대화한다. 탈출해야 하지만 그리운 데고, 독창성을 주되 지속성을 뺏는다. 묘연한 이 경계가 시와 소설의 ‘결합 감상’을 통해 더 구체적으로 포착될 법하다. ‘이경진’의 외조부모 이민사에서 착안했을 법한 시 ‘오프 화이트’ ‘굿모닝 아메리카’ 등이 <나의 미치광이 이웃> 미아로 더 현재화하는 식이다.
“아침이 계속되는 밤이란다 빛이 계속되는 아침이란다 그래서 하루를 끊임없이 살아내야 하는 고된 밤이란다. …빛은 어둠을 이긴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빛은 항상 어둠의 윗몸이다 툰드라에 빛이 이렇게 가득하다면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 언제 어둠이 닥칠지 모르는 지금이 가장 무서운 거란다”(‘툰드라’ 부분)는 시를 소설 속 미아는 본능처럼 작품의 에스프리로 구현할 뿐이다.
“서른다섯 살이면 성장 끝/ 죽음 시작이래요”(시 ‘구성원’ 부분)는 에세이 <서른다섯, 늙는 기분>과, “나는 나에게 질식하여/ 발작한다//…// 우리 집이 다 빨갰으면 좋겠다// 나는 빨간색 펜을 꺼내 내 이름을 죽 쓴다/ 이경진 이소리 이소호// 누구부터 죽여야 행복할 수 있을까// 펜은 나부터 죽였다”(‘택시 마니아’ 부분)는 첫 에세이(<시키는 대로 제멋대로>)와 간섭을 이루고, “언니 나야 왜 요즘 내 전화 잘 안 받아? 언니는 왜 언니 시 보낼 때만 연락해?… 시에 팔아먹을 때나 연락하고 말이야. 인권에도 저작권이 있어 씨발 네가 쓸 때마다 나 돈이나 줬냐 내 이름 쓸 때마다…”(‘멜버른에서 온 편지’ 부분)와 같이 은유된 재현의 윤리는 다시 소설 속 미아의 피사체에 대한 염결함과 포개진다.
이소호 시인은 <홈 스위트 홈>을 두고 “지금까지 가장 차분한 시집”이라고 말하지만, 시집은 삽화를 포함한 갖가지 행위를 동반한다. “2030대 여성 독자들이 대부분인데 10명 중 2명은 남자예요. 저도 놀랐어요. 군대에서 책을 보게 됐다는 독자도 있거든요.”
시인은 밤 8시~9시 시든 산문이든 하루 한 편을 쓴다. 적바림이 일상이다. 서울예대 문창과 재학 중 “소설 수업을 단 한 번 들어본 적 없다”고 했으나 되레 “신나게 쓴 소설”도 그렇게 ‘지어’졌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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