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스스로 ‘지도’가 된 사람들
장애인권 활동가 6명의 생애사
고통과 슬픔을 온몸으로 직면하며
한걸음씩 내딛어온 경이로운 서사
전사들의 노래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
비마이너 기획·홍은전 지음, 훗한나 그림 l 오월의봄 l 2만1000원
영희가 어린 시절 아주 잠깐 학교에 다녔을 때, 담임선생님이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물었다.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 영희는 자기 차례가 될 때까지 뭐라고 답을 할지 머리가 하얘지도록 고민했다.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답을 찾아냈을 때, 담임선생님은 영희 앞에 섰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은 그에게는 질문하지 않고 지나가 버렸다.
규식은 어려서부터 시골 오지의 종교시설에 주기적으로 맡겨지면서 자랐다. 삶은 매우 단조로웠다. 방 안에서 먹고 자거나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 외에는 없었다. 어느 날 시설에 여고생들이 봉사하러 왔다. 학생들과 동네 저수지에 가서 놀았다. 태어나서 ‘놀이’라는 걸 처음 해봤다.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그에게 ‘시간’은 오직 견디기 위해 버텨야 하는 대상이었는데, 깜짝 놀랐다. 그때 그의 나이 25살이었다.
어렸을 적 집에서 텔레비전만 보며 살았던 명애가 가장 좋아하던 프로그램은 마라톤 중계였다. 선수들 옆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좋아서 마라톤 중계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보았다. 그렇게 세상이 궁금했지만 그가 집 밖으로 나오는 데는 47년이 걸렸다.
인권기록활동가 홍은전 작가의 <전사들의 노래>는 주로 언론의 사회면에 등장하던 유명 장애인권 활동가 6명의 생애를 총천연색으로 복원한 책이다. 책은 온통 허를 찌른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다음으로 가장 많이 받는 ‘너는 커서 무엇이 될래?’라는 질문이 누군가에겐 아예 주어지지 않는다. 너댓살만 되어도 아는 ‘노는 게 재미있다’는 사실을 성인이 되어서 알게 되는 사람도 있고, 선수가 아니라 풍경을 위해 마라톤 중계를 보는 사람도 있다.
책의 주인공들은 박길연, 박김영희, 박명애, 이규식, 박경석, 노금호다. 누구는 중도 장애를 입었고 누구는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뇌병변장애부터 소아마비, 척수장애까지 병명도 다양하다. 대부분의 공통점은 수년에서 수십년간 집이나 시설에서만 갇혀 살다가 우연히 누군가를 만났다가, 복지관을 찾았다가, 야학을 방문했다가 삶이 휘몰아치듯 변화하더니 어느 날 돌아보니 한국 장애인권 역사의 한복판에 서 있더라는 것.
뼛속까지 시린 농성장에서 수많은 밤을 지새우고, 녹아내리는 뜨거운 아스팔트 도로 위를 기어가는 시위를 벌이고, ‘007작전’을 벌이듯 시설에 갇힌 중증장애인들을 탈출시키고, 경찰에 끌려가고 구치소에 갇히고, 휠체어는 수시로 박살 나고, 몸뚱아리는 종종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책은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 없는 강한 흡입력과 속도감을 자랑한다. 특히 흑백 무성영화와 같던 그들의 인생이 컬러 유성영화로 변화하는 그 시점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소심하고 무기력했던 그들이 두려움 없는 전사로 변할 때 그들의 느낌은 무엇이었는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그땐 정말 뭔가에 홀렸던 것 같아요. 정신이 온통 농성하는 데 쏠려 있었어요.”(박길연)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꿈꿨고 그걸 실현하고 싶어서 시간과 건강, 청춘을 갈아 넣었어요. 그게 기쁨이고 희망이었어요.”(노금호)
“그때부터 꿈이 생겼어요. 32년을 살면서 그렇게 꿈에 부풀었던 적은 없었어요.”(이규식)
“바람에 머리가 날리는 것도 좋았고 비 올 때 우산 쓰고 가는 것도 너무 좋았어요. (…) 힘드니까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투쟁 현장에 있는 하루하루가 행복했어요.”(박명애)
거의 400쪽에 이르는 이 책에서 그들 누구도 투쟁과 농성 현장에서 당한 손가락질이나 조롱, 모욕과 멸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뭐에 홀린 듯한 순수한 몰입과 기쁨, 그들을 황홀하게 흥분시켰던 꿈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저자의 말대로 그들의 삶은 “한 번도 지도로 그려진 적이 없는 세계에 태어난 사람이 미지의 땅을 탐험하면서 스스로 지도가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란, 보편성과 특수성을 아름답게 교직하고 있는 이야기다. 이 책의 표면적인 소재는 장애인 활동가의 생애사다. 이동권 투쟁부터 활동지원서비스 제도화, 탈시설, 장애등급제 폐지 운동까지 한국 장애인권운동사로 읽혀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온몸을 압도하는 고통과 슬픔에 발목이 잡힌 인간이 어떻게 그 삶을 직면하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지에 대한 경이로운 서사다. 고통과 슬픔이 임계점에 다다르면 어떤 응집된 폭발력을 갖는지, 그 한 걸음을 내디딜 때 그들이 느끼는 감각은 어떠했는지, 타인의 고통을 구원하는 것이 어떻게 나의 고통을 구원하는지에 대해 모조리 들려준다.
진짜 삶에 눈을 뜨게 되면 그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법이다. 피하고 뭉개고 숨고 도망가는 삶은, 상처는 덜 받겠지만, ‘오직 내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없다. 대신 슬픔과 고통을 또렷이 직면하면 기쁨과 행복도 ‘내 것’으로 선명하게 움켜잡을 수 있다는 걸 주인공들의 삶은 보여준다. 그래서 그들은 그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책은 진보적 장애인언론 <비마이너>에 연재된 글들을 묶어낸 것이다. 강혜민 <비마이너> 편집장은 “내겐 소중한 사람이 언론에선 ‘불쌍한 장애인’ 정도로 취급됐다. 그것은 무척 모욕적이었다. 그러한 세상의 말과 글에 반격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홍은전 작가와 손을 잡고 기록을 시작한 이유다.
책에는 불쌍한 장애인도 불쌍한 사람도 없다. 다만 자기 앞에 주어진 생을 무섭도록 직면하고 도망가지 않고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며 미래 세대를 고민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눈물 콧물 다 흘리고 넘어지고 깨져도 다시 일어서서 부딪치고 깨부수고, 그래서 그들에게 던져지는 조롱과 무시쯤은 ‘한 줌’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리하여 자기 생의 영웅이 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김아리 객원기자 ari@hani.co.kr, 그림 훗한나, 오월의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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