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해 ‘폭력이 줄었다’ 주장하는가 [책&생각]
선형적인 스토리텔링 위한 역사적 사실 선별·배제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
스티븐 핑커의 역사 이론 및 폭력 이론에 대한 18가지 반박
필립 드와이어·마크 에스(S). 미칼레 엮음, 김영서 옮김 l 책과함께 l 3만8000원
인지심리학자 스티븐 핑커(69)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2011, 이하 <선한 천사>)란 책으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인간이 이성·과학·휴머니즘을 바탕으로 삼아 세상을 과거보다 조금씩 더 낫게 만들어왔다는 주장, 곧 ‘계몽주의’가 핑커의 토대다. 인간의 전체 역사에서 폭력이 줄어든 통계를 제시하는 등 실증적인 방법을 동원해 ‘진보’에 대한 믿음을 설파하는 그의 작업은 비관주의에 지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선한 천사>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단언한다. “믿거나 말거나 폭력은 긴 세월에 걸쳐 감소해왔고 오늘날 우리는 우리 종이 존재한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우리 본성의 악한 천사>는 여러 역사학자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핑커의 작업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책이다. 엮은이인 필립 드와이어 오스트레일리아 뉴캐슬대 교수와 마크 미칼레 미국 일리노이대 명예교수가 “핑커가 내놓은 얼토당토않은 주장의 일부를 반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2017년 학술지에 실었던 특별 기획을 다듬어 단행본으로 내놓았다. 이들은 “오늘날의 삶이 전보다 덜 폭력적이라는 핑커의 주요 논지가 필연적으로 틀려서 그를 비평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 핑커의 문제점은, 폭력과 관련된 데이터를 의도적으로 취사선택하거나 오용하는 연구방법의 문제에서부터 그의 주장이 은밀하게 품고 있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선한 천사>에서 핑커는 ‘대인간 폭력’을 보여주는 살인율, 전쟁행위에 의한 사망자 통계 등 실증적인 데이터들을 앞세워 폭력이 오랜 세월에 걸쳐 감소해왔다고 주장한다. ‘비국가 사회’와 ‘국가 사회’에서 연간 인구 10만명당 전쟁행위로 인한 사망자 수를 비교하는 통계, 1300년부터 유럽의 살인율이 감소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통계 등이 대표적이다. 폭력의 감소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토대로는 “당신이 전혀 들어보지 못한 가장 중요한 사상가”라며 독일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1897~1990)의 ‘문명화과정’ 이론을 주로 참고한다.
거칠게 말하면, 근대 초기 서유럽에서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고안된 통제력이 점점 더 넓게 확산되어 살인율 감소 등 ‘문명화’를 자리 잡게 했다는 이론이다. 핑커는 폭력을 감소시킨 ‘선한 천사’로 이성과 감정이입 등의 역량을, 다섯 가지 역사적 힘으로 사적 폭력을 억누르는 ‘리바이어던’(국가나 사법체계),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온화한 ‘상업’, ‘여성화’, ‘세계주의’, 지식과 합리성을 기초로 삼는 ‘이성의 에스컬레이터’ 등을 꼽는다.
지은이들은 핑커가 동원한 통계와 연구방법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핑커는 선사시대 유적지 22곳의 전쟁행위 사망자를 통계로 제시하며 선사시대 일반의 상황을 논의하는데, “작은 무덤에서 발견된 21구의 개인 유해만으로 선사시대의 폭력적 상호작용에 대한 범지역적 혹은 대륙적 추세를 광범위하게 논하기 어렵”다. 핑커는 농경 정착이 폭력 감소와 영향 있다고 주장하는데, 중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골들 사이에서 별다른 차이는 나타나지 않는다. 핑커는 중세를 폭력이 만연했던 야만의 시대로 그리는데, ‘검 삼키기’ 전문 곡예사의 책은 인용되지만 그의 “참고문헌 목록에 오른 중세 연구 역사학자는 단 5명에 불과하며 이들의 연구마저 중세에 대한 그의 분석에는 미미한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중세로 잘못 연결된 폭력의 대부분은 사실 근대 초기에 벌어졌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연구방법 그 자체보다는 핑커가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에 있다. <선한 천사>에서 토착 아메리카인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며, 주로 ‘비국가 사회’의 높았던 폭력성을 보여주기 위해 등장한다. 핑커는 “아스테카는 매일 40명, 총 120만명을 제물로 바쳤다”는 식으로 통계까지 제시하는데, 그 원천이 된 자료는 “프란체스코회 수사들과 이런저런 가톨릭교회 주석자들이 ‘외삽’한 것으로, 아스테카문명을 악마화하고 스페인 정복과 식민화에 한몫하는 데 사용된 모든 방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장이었다.” 핑커가 유럽인들이 정착하는 과정의 폭력을 아예 언급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뒤, 그러니까 ‘문명화과정’ 뒤의 토착 아메리카인은 사라져버린다. 여기에 “핑커가 감춰둔 온화한 설정”이 있다.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 것은 서구가 그 외 다른 문화에 대해 거둔 승리”라는 메시지다.
지은이들은 핑커의 작업이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를, 자유시장과 서구 문명의 압도적 유익을 옹호하고 있다”고 입을 모아 지적한다. 폭력이 감소했다는 사실이 왜 중요‘해야’ 하나? “핑커의 웅대한 역사적 비전에서 폭력의 감소는 그 자체로 다른 것의 대용물, 말하자면 행복의 대용물이다.” 핑커에게 행복의 증진, 그러니까 ‘진보’를 가능하게 한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중앙집권식 국가의 부상, 지역 간 상업의 확대, 문명화한 행동의 확산. 이성을 역량으로 키워낸 계몽주의가 어떤 허브(서구 문명)에서 나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외길의 ‘스토리텔링’을 완성하기 위해, 핑커는 실제 역사의 경로를 선별하고 배제하는 작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는 비판이다.
실제 역사를 제대로 보기 위해 우리는 되레 그의 두터운 서술 안에 포함되지 않은 것들을 주목해야 한다. “1965년 이래 (…) 흑인에 대한 테러는 어떤 중요한 지역사회로부터도 더는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핑커의 간단한 서술은, 오늘날 미국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로 폭발한 인종주의와 관련된 폭력을 아예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마찬가지로 빈곤, 성폭력, 환경·동물에 대한 폭력, 현대의 노예제인 국제 인신매매, 사이버 폭력 등 오늘날 우리가 직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폭력은 핑커가 자부해 마지않은 ‘근대성’에 뿌리를 댄다. 폭력의 ‘감소’를 자랑할 것이 아니라 폭력의 ‘변화’를 제대로 봐야 한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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