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세상에 정말 멋진 이야기야, 그런데 도대체 무슨 말일까

김진형 2023. 4. 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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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출신 박정대 시인 인터뷰
지난해 귀향 후 ‘율란통신’ 출간강원문인 참여 장르 초월 책자
시집 ‘체 게바라 만세’도 복간
“정선서 이절 국제 시축제 꿈꿔
잠시라도 문학 순수성 느끼길”
▲ 최근 만난 박정대 시인은 “내게 정선은 모든 것을 시작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안할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했다.

박정대 시인은 지난해 10월 고향 정선으로 돌아왔다. 홀로 자작나무를 옮겨 심은 그의 작업실 이름은 ‘이절에서의 눈송이 낚시’, 이절은 정선읍 애산리를 이르는 마을 지명이다. ‘이절’이 갖는 특유의 어감이 좋아서 만든 이름이다. 서울에서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퇴직한 그는 반려견 ‘양조위’와 함께 별이 쏟아지는 정선의 고요함과 마중한다. 귀향 후 한 차례의 겨울과 봄을 지낸 그는 정선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공간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이 혁명적 인간은 정선에서 ‘이절 국제음악제’와 ‘이절 국제영화제’, ‘이절 국제 시 축제’를 꿈꾸고 있다. 고향 한해 선배인 전윤호 시인도 이곳에 ‘정선예술창작소’를 만들어 예술적 반동을 모색하고 있다.

혁명을 위한 망명이었을까. 최근 춘천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시인은 “학교에서 30년을 꼬박 채웠다. 팔에 마비가 와서 교직을 그만뒀고, 서울과 분리된 나만의 공간을 찾기 위해 전국을 다녀 보니 결국 정선이었다”고 했다. “살벌했던 서울”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생존을 위한 시간이었고 이제서야 꿈꾸던 전업시인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각종 강의와 함께 강원도 작가들과의 활발한 교류도 준비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내 인생을 살려고 보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하고 잘 모르겠다”는 것이 그가 마주한 오늘이기도 하다. 시인은 “서울의 치열함이 시를 쓰기에는 오히려 좋은 환경일 수는 있다. 구체적인 계획을 짜서 고향에 다시 온 경우는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나태해지지 않도록 온몸으로 부딪쳐 나가며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려고 한다”고 했다. ‘인터내셔널급진오랑캐밴드’의 멤버로도 활동 중인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영화감독 ‘오랑캐 이 강’이다.

작업실 ‘이절에서의 눈송이 낚시’ 풍경.

■ 율란통신

최근 활동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박정대 시인이 참여한 단행본 시리즈 ‘율란통신’이다. 총 21명의 필진이 함께 한 지금까지 없던 장르의 책이다. 시이거나 산문이거나,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다. 부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무용한 혁명’. 책의 기획과 편집을 맡은 인물은 ‘무사 강돌’이다. 정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 책을 만들기 위해 올해 태어났다고 한다. ‘무사’는 아프리카어로 ‘뮤직(Music)’을 뜻한다. 아마도 박정대 시인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추측된다.

시인에게 혁명은 ‘한 마리의 감정’과 같다. 박 시인은 “혁명하면 보통 정치적인 부분을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혁명은 예술적 혁명”이라며 “예술적 혁명은 아름답고 무용해야만 가능하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우리끼리 무언가 만들어 보자라는 개념으로 낸 책”이라고 출간 배경을 밝혔다.

책에는 여러 작가의 분열된 자아들이 등장한다. 박정대 시인을 포함해 함성호·전윤호·박용하·박제영·김도연 등 강원지역 문인들의 이름이 다수 들어가 있고 문태준·강정 시인, 엄경희 평론가 등도 참여했다.대부분 최근 출간된 책에서 골랐다. 르클레지오, 짐 자무시의 이름도 보인다. 어떻게 섭외했냐고 물어보니 ‘무사 강돌’이 이들과의 친분이 깊어 수록했다고 한다. 정체를 알려 할수록 모호한 함정에 빠져든다.

작가 소개 또한 특이하다. 이를테면 함성호 시인은 ‘함타이치’, 동북면 여진족이다. 박정대 시인의 경우 ‘남만 이절족’이다. 이 낭만적인 책은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눈송이처럼 느껴진다. 제목은 백목련의 이름인 ‘율란’에서 착안했다. 시인은 “독수리타법으로 일일이 원고를 쳤다. 10월 이절 시낭송회의 기반이 되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글들을 한번 묶어볼까라는 생각에서 책을 만들다 보니 정체성이 생겼다. 강원 출신이 절반 이상이고 오랑캐밴드 멤버들도 들어가게 됐다”며 “사람들이 이 책을 접하게 되는 순간만이라도 고달픈 현실의 정치나 사회문제를 잠깐 잊고 문학의 순수성에 빠지게 되길 바란다”고 했다.

■ ‘체 게바라 만세’

박정대 시인의 시집으로 제22회 대산문학상 수상작인 ‘체 게바라 만세’도 최근 복간됐다. 달아실 어게인시인선 시리즈의 첫 번째 책이다. 많은 시인들이 박정대의 시집 중 첫 손가락으로 뽑는 책이다. 시인 또한 자신의 시집 중 애정을 갖는 작품으로 이 책과 함께 ‘아무르 기타’, ‘삶이라는 직업’을 꼽았다. 책 앞날개에는 인터뷰 영상 QR코드도 들어가 있다. 이 책은 대산문학상 수상 당시 “최근 시단의 기계적이고 난해한 경향에 대한 의미 있는 반격”이라는 평도 받았다. 시에서 언급되는 밥 딜런, 밥 말리, 빅토르 최, 앤디 워홀, 왕가위, 짐 모리슨, 짐 자무시, 백석, 니체 등은 모두 시인에게 좌파적 예술가다. 시인은 이 시집의 제목으로 인해 문화계 블랙리스트 명단에도 올랐었다.

‘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이라는 시를 읽을 필요가 있다. “누군가는 아프게 생을 밀고 가는데 우리는 하염없이 밤을 탕진해도 되는 걸까 생각을 하면 두려웠지 두려워서 추웠지 그래서 동이 틀 때까지 너의 노래를 따라 불렀지”라는 대목은 음악처럼 느껴진다. 박 시인은 “이 책을 펴낼 때가 전성기였던 것 같다. 어려우면서 재밌기도 하고 동료 시인들이 많이 좋아했다”고 했다.

그의 시에서 핵심을 찾으려는 행위는 무용하다. 존재하지 않는 듯한 실체는 시의 숨결에서 찾을 수 있다. 박 시인은 “시를 쓸 때 교훈을 주는 것 자체를 싫어한다. 읽고 나서 사람들이 좋아하면 다행이고 아무것도 없으면 할 수 없다”며 “강요하고 싶지 않다. 노래 가사처럼 누군가가 한 구절 툭 던지듯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박 시인은 그간 10권의 시집을 냈다. 올해는 첫 산문집을 준비하고 있다. 그간 산문적 경향이 강한 장문의 시들을 많이 내기도 했다. “박정대의 글이 어디로 향할 것 같느냐”고 묻자 ‘알 수 없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시인은 “파스칼키냐르의 글을 보면 어떤 글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쓰면서도 무엇인지 모르는 글을 써야만 작가는 살아있을 수 있다”며 “이미 예측한다면 작가로서 발전도, 재미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은 답은 인터뷰 형식으로 그의 시론을 풀어낸 시 ‘파르동 파르동 박정대’에 이미 나와 있다.

“세상에, 정말 멋진 이야기야,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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