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1. 설악산-정월, 눈의 달 아래 대청봉을 오르며

장보영 2023. 4. 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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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빛 희망 찾아 내딛는 걸음, 잘 가 겨울아
대한민국 대표 바위산 겨울철 설경 장관
2월 대설주의보에도 두번째 ‘한계령’ 산행
찬바람 이겨내며 인생의 답 찾는 도전
자연 벗 삼아 첫 ‘대청봉 일출’ 향해 질주
태양보다 먼저 정상 올라 하루 시작

트레일러너이자 산악 전문 기자 등으로 활동한 장보영 작가와 함께 하는 ‘정상에서 쓰는 편지’가 매달 1편씩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내외 산을 10년 이상 누빈 산 전문가로서 고향 강원도의 산을 오르며 보내는 편지입니다. 직접 촬영한 풍경사진도 함께 실어 강원 산의 계절별 아름다움, 등산의 즐거움, 읽고 보는 기쁨을 함께 드릴 예정입니다. 등산을 통해 쌓아가는 단상과 마음가짐이 담긴 편지를 통해 ‘오르내리는 일’의 의미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 대청봉에서 바라보는 설악의 산하.

아주 오랜만에 당신을 생각합니다. 시간을 불쑥 멈춰 세우고 마주한 공백 앞에서 기한이 다한 약속처럼 당신이 떠오릅니다. 잘 지내고 있나요? 그곳은 따뜻한가요? 지난겨울은 여느 해보다 유독 추웠습니다. 또 하얀 눈이 시도 때도 없이 내렸습니다. 한데 이 모든 일이 기상이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리 낭만적으로 느껴지던지요. 밤사이 폭설이 쏟아진 다음 날이면 수려한 설국이 펼쳐지곤 했습니다.

아침의 창가에 서서 뒷산의 눈부신 능선을 바라보며 그 산을 떠올렸습니다. 하얀 눈의 산으로 불리는 산. 겨울이면 숭고한 산봉 위로 히말라야 만년설의 장관을 연출하는 산. 그리하여 설봉산(雪峰山), 설산(雪山), 설화산(雪華山)으로 불린 산. 우리나라 바위산을 대표하는 산. 한반도의 척추 백두대간 한가운데 솟은 산. 한라산(1950m)과 지리산(1915m)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 바로 ‘설악산(雪嶽山·1708m)’ 말입니다.

설악산은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누구든 동경하고 염원하며 그리워하는 산일 것입니다. 그리고 설악산을 한 번도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단 한 번만 간 사람은 없을 거라 단언합니다.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그 산의 자태를 보면 알 수 있지요. 언젠가 안간힘을 다해 딱 한 번만 대청봉 정상에 올라보세요. 이 세상 그 어떤 산을 가도 그러한 장면은 보지 못할 거예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장면이 그곳에 있을 거예요.

밤을 뚫고 한계령에 도착하니 새벽 3시 30분입니다. 입산 시간까지 남은 30분 동안 등산로 입구 화장실 안에서 배낭에 빠진 것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고 모자, 목도리, 장갑 등도 단단히 여밉니다. 2월의 산은 한파가 한창입니다. 한계령이 해발 천 고지이니 어지간한 산의 정상에 버금갑니다. 뼛속 깊숙이 파고드는 찬바람에 돌연 지금의 선택을 후회합니다. 따스한 이불과 포근한 단잠, 그런 것들이 간절해집니다.

▲ 설악산의 일출. 동해의 수평선 너머로 태양이 힘차게 떠오른다. 

새벽 4시.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의 무리가 되어 동굴 같은 어둠 속으로 나아갑니다. 수십 개의 헤드랜턴이 반짝이는 산은 가로등을 켠 것처럼 금세 환해집니다. 깎아지르듯 치솟은 저 계단은 천국으로 가는 길일까요? 왜 이 많은 이들은 이 밤, 이 추위 속에서 자신의 무게를 힘겹게 짊어지고 이 산을 오르는 걸까요? 저마다의 답이 있을 테지만 누구도 쉽게 말하는 법이 없습니다.

설악산에 그토록 많이 왔어도 이 길은 초행입니다. 보통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새벽 첫차를 타고 9시쯤 오색 입구에 도착해 대청봉에 오르곤 했습니다. 대청봉까지 5㎞, 그 길이 정상으로 가는 가장 곧고 빠른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고되고 가파른 길이기도 했습니다. 첩첩한 초목에 갇혀 코끝을 산길에 대고 오로지 오르고 오르는 것 외에는 대단히 감탄할 일도 없었지요. 하산길은 때마다 달랐습니다. 기분이 조금 고적할 때는 봉정암을 거쳐 백담사로, 청량한 바다가 보고 싶을 때는 소공원으로 내려갔습니다.

한계령에 오고 싶었던 이유는 그 어느 여름날에 이 길로 하산한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남교리에서 올라 십이선녀탕을 보고 귀때기청봉을 거쳐 대청봉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는데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그만 능선 위에서 해가 저물고 말았습니다. 대청봉은커녕 소청봉 코빼기도 안 보이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계령에서 그날의 도전을 접어야 했습니다. ‘귀때기’ 맞고 ‘한계’ 직면했다는 중얼거림은 결코 농담만은 아니었습니다. 정말이지 그날 우리의 몸과 마음은 돌너덜의 그 길처럼 너덜너덜해졌습니다.

최근 대설주의보가 내려 등산객의 출입이 통제됐던 터라 등산로가 희미합니다. 또 정강이까지 눈 속에 푹푹 빠져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까스로 한계령 삼거리를 지나 서북능선에 다다릅니다. 산에 들어선 지 1시간 10분 정도 지났습니다. 이제 대청봉까지 6㎞ 남짓 남았습니다. 이즈음 일출 시각은 7시 30분입니다. 부지런히 이동하면 대청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배낭의 어깨끈을 바짝 당기며 속도를 올려봅니다.

설악산은 오래전부터 산꾼들의 집이었습니다. 토왕폭, 적벽, 울산바위, 장군봉, 무명봉 등 두 발로 걸어 오를 수 없는 기암괴석 위에서 대한민국의 기고 나는 산꾼들은 자신의 등반 실력을 연마하며 8000m 설산 등정을 꿈꿨습니다. 당신의 청춘도 이 산에 있었나요? 산에서의 추억을 들려주던 당신의 눈은 어찌나 매번 그리 빛나던지요. 목소리는 또 왜 그리 떨리던지요. 반복되는 이야기를 당신은 언제나 처음 말하는 것처럼 신나게 말했고, 또 저는 그 이야기를 언제나 처음 듣는 것처럼 열심히 들었습니다.

▲ 대청봉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일출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 밤을 송두리째 삼키고 더 깊고 짙은 어둠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이 산의 산정들. 북편으로 공룡의 등뼈를 닮은 산줄기와 그 곁의 이름 모를 능선들이 검은 평행선을 그리며 어디론가 달려갑니다. 이번 생에 저 높은 곳에 오를 날이 있을까요? 지금 제가 걷고 있는 이 길의 끝을 본다고 해도 아마 이 산의 은밀한 구석까지는 다 닿지 못할 것입니다. 문득 유난히 사위가 밝아 고개를 두리번거립니다. 등 뒤 하늘 위에 쟁반 같은 달이 두둥실 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월대보름입니다. 2월의 보름달은 ‘눈의 달’이라 부른다는데 정말이지 지금 이 순간과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입니다.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는 것이 얼마 만인지요. 일출을 향한 욕심에 발길을 재촉했더니 주변에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습니다. 멀리서 흔들리는 빛이 반가워 재빨리 다가갑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타나는 것은 애꿎은 등산로 야광 표식입니다. 다가가고 멀어지고 또 다가가고. 그사이 바위틈을 통과하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그 바람에 서걱이는 나무 소리가 들립니다. 정신은 또렷해지고 지분거리던 마음은 차분해집니다. 하지만 여전히 잠이 쏟아집니다. 화려한 모든 것을 감추고 흑과 백으로만 남은 이 길이 조금 지루합니다.

발밑으로 44번 국도가 용광로처럼 흘러갑니다. 착시 현상인지 저 길이 겨우 몇 미터 아래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간격을 두고 지나가는 차들이 긴 여음을 남기며 사라집니다. 사람의 흔적, 문명의 기척 같은 것에 겨우 안심하며 스스로 다독입니다. 너무 무섭고 힘들면 언제든지 저 아래로 내려갈 수 있어. 저 아래의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거야. 달, 나무, 바람, 그리고 빛. 혼자인 것 같은 길 위에 이토록 많은 것이 동행하고 있습니다. 시선을 두는 곳마다 부단히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오전 7시 10분. 중청봉에 도착합니다. 일출까지는 20분 정도 남았습니다. 바람을 피하러 잠시 들어간 대피소 안은 이곳에서 묵은 등산객들로 분주합니다. 하얀 공기를 가르며 이곳까지 질주한 지난밤이 새삼 전생의 일처럼 아득합니다. 졸리고 춥고 심심하고 두렵고 외롭던 그 길 위에 다시 오를 수 있을까요? 5월이 오면 모처럼 백담사에 가봐야겠습니다. 겨우내 얼어 있던 수렴동 계곡이 햇살 아래 찬란할 것입니다.

대피소에서 나와 대청봉으로 향합니다. 해보다 먼저 정상에 올라야 하기에 서두릅니다. 대지가 주홍빛으로 물들며 하루를 열어갑니다. 설악산에 그토록 많이 왔어도 대청봉 일출은 처음입니다. 당신도 대청봉 일출을 본 적이 있나요? 당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것을 모르고 있네요. 저 멀리 동해가 수런거립니다. 수평선 위로 서서히 정수리를 내미는 오늘의 태양 앞에서 나는 나의 아주 오래된 기도를 올립니다. 물론 당신을 위한 기도도 잊지 않습니다.

■ 장보영 작가·에디터

△인제 △한국등산학교 졸업 △ 월간 ‘사람과 산’, 매거진 ‘PAPER’, ‘RUNNER’S WORLD’ 한국판,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취재 기자 △에세이 ‘아무튼, 산’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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