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 뒤 일상이라는 폐허를 살아나가는 법 [송지현의 자.독.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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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치열한 경쟁을 버텨내는 청년들에게 문학도 하나의 쉼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내면서 여전히 서로를 '편안하고 편안하다'고 느끼지만, 이것 또한 아주 잠깐 언급될 뿐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집요할 정도로 묘사된 우경과 해인의 하루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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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치열한 경쟁을 버텨내는 청년들에게 문학도 하나의 쉼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 중 빛나는 하나를 골라내기란 어렵지요. 소설집 '여름에 우리가 먹는 것'으로 제55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송지현 작가가 청년들의 '자연스러운 독서 자세 추구'를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한국일보>를 통해 책을 추천합니다.
나는 이주란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데, 어느 정도냐면 부사를 끝도 없이 붙이고 싶을 정도다. 정말, 매우, 많이, 진짜, 엄청······. 이렇게 부사를 늘어놓다보면 새삼 내가 참 말 많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이주란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정반대의 지점이다.
이주란의 소설 세계에서는 절대 발화되지 않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인물이 겪었던 어떠한 사건이다. 그 사건은 인물의 인생을 뒤바꿀 정도로 아주 결정적인 것으로 짐작되지만 작가는 도무지 우리에게 그것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인물들의 관계마저도 대략적으로 가늠해볼 수밖에 없는데 '수면 아래'의 인물, 우경과 해인은 결혼을 했었으나 그 결혼 생활은 모종의 사건으로 현재까지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정도의 정보만이 주어진다. 그런 그들이 더 이상 만남을 지속할 수 없는 사건은 이런 식으로 서술되는데,
"나는 우경과 마주앉은 채로 얼굴은 마주하지 못하는 중이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우경이 다시 해인아, 하고 불렀을 때에야 그를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주란 '수면 아래' 91쪽)
앞서 언급했다시피 그들이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는 구체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독자는 그저 그들이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나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내면서 여전히 서로를 ‘편안하고 편안하다’고 느끼지만, 이것 또한 아주 잠깐 언급될 뿐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집요할 정도로 묘사된 우경과 해인의 하루들이다. 그들의 일상은 ‘떨어진 외투를 다는 아주 사소한 일’까지 낱낱이 드러나 오히려 비일상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화자는 자신의 하루를 왜 이렇게까지 세세히 나열하고 있는 걸까.
내가 왜 이주란 작가의 소설을 좋아하는지를 다시 말할 때다. 어떤 일들은 내뱉어버리는 순간 일어날 법한 일로 치환되고 만다. 발화하는 순간 ‘그 일’은 인과관계를 가진, 어떤 모양새를 갖춘 사건이 되어버린다. 모양이 생기고 나면 모두가 그걸 볼 수 있으므로 판단을 내린다. 그 슬픔에 대해, 그 우울에 대해. 그러니 나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꾼 결정적인 ‘그 일’을 온전히 간직하려면 감히 내뱉을 수조차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신 이주란의 소설은 오히려 사소한 하루들을 주목한다. 삶이라는 재해가 휩쓸고 간 뒤에도 남아있는 일상은 누구보다도 기를 쓰고 살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예전엔 도대체 어떻게 이 모든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문득 생각해볼 정도의 하루하루들. 우리는 어떻게든 슬프고, 슬플 것이고, 그렇기에 슬픔이 휩쓸고 간 뒤의 일상이라는 폐허를 정돈하며 살아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절대로 슬픔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은 채.
송지현 (소설가)
송지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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